나의 첫 마라톤
기안 84의 첫 풀코스 마라톤 도전이 방영된 이후, 러닝이라는 종목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사실 난 기안 84의 마라톤 도전만큼 '마라톤'에 대한 큰 관심은 없었다. 그냥 러닝이라는 운동 자체를 좋아했다. 5km를 뛸 수 있게 되었더니 어느덧 거리를 늘려 10km도 뛸 수 있게 되는 것이 신기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개운함이 좋았다.
하지만 나도 3분만 뛰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3분을 뛰고 1분을 걸으면서 30분을 채웠고, 어느 날은 오기가 생겨 5분으로 뛰어보기도 하였다. 5분이 익숙해지는 날에는 10분, 20분 그리고 계속 뛰어보니 이제는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늘어가는 시간과 거리를 보며 러닝이 참 정직한 운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노력한 만큼 몸이 답해주는 이 경험이 신기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달리기 좋아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삶에 러닝이라는 취미가 조용히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찬바람이 불고, 높은 산의 지붕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을 느끼며 산을 즐기는 계절이 짧게도 지나갔다. 그런 날에, 갑자기 나도 마라톤에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42.195km라는 무시무시한 거리는 아니었다. 하프코스도 가늠되지 않았기에, 풀코스는 내 인생에 아주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런 내게 10km가 딱 좋았다. 5km는 조금 아쉬우니, 10km에 도전하고 싶었다.
기억을 거슬러 보면, 첫 10km는 친구와 떠난 제주도 여행이었다. 10km를 내리뛸 체력이 아직 되지 않았기에, 최대한 즐기면서 달려보자.라는 마음이 컸다. 친구보다 하루 빠르게 제주도에 도착하여, 다음날 달릴 코스를 훑어보았다. 숙소가 있는 월정리해변부터 평대해변을 갔다 오면 딱 10km가 되었다.
여행의 또 다른 설렘이었다. 등산만큼이나 다음날이 기다려지는 소풍 같았다. 특히나 바닷가를 옆에 두고 달린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좋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상상한 ’ 멋진 어른‘의 모습 중 하나였을 수도 있겠다. 잠들기 전 뛰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어릴 적 생각한 멋진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가니 몽롱한 기분이었다. 하루의 시작은 이르게 느껴지는, 조용한 동네를 걸으니 잠에서 조금씩 깨기 시작하였다. 바닷가 근처에 와 아직은 달큼한 잠에 취한 몸을 풀었고, 달리기 어플을 켜고 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금 무작정 달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숨이 금방 찼다. 곧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1km만 뛰고, 500m를 걷자.”라는 계획으로 급히 수정했다. 계획을 바꿔도 1km가 왜 이렇게 긴지 뛰는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보였고, 걷는 500m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지나갔다. 그래도 옆에 보이는 시원한 바다를 보면 또 기분이 좋았고, 머리를 헝클이는 바람이 시원했다.
달리는 나를 둘러싸는 풍경에 저절로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고요한 아침바다가 참 이뻤다. 그러다 보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도 처음보다 편했다. 이 정도라면 금방 10km를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마 이때부터 저절로 느낀 것 같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가야 한다. ‘천천히‘라고 마음먹으니 10km가 눈앞에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상쾌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았기에 10km라는 거리가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마라톤에 쉽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전은 같이 하는 즐거움도 뺄 수 없는 법. 나만큼이나 운동을 좋아하는 한 친구가 있어, 친구에게 같이 마라톤에 나가보자고 권유했다. 도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고, 그렇게 나의 첫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마라톤은 처음인지라 인터넷에 짐을 어떻기 맡기는지, 추운 날에는 복장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계속 검색했다. 접하는 정보들은 신기한 것 투성이었고, 너무 낯선 장소와 활동이기에 모든 것이 잘 가늠되지 않았다. 종종 친구와 이런 아리송한 마라톤에 대해 이야기하며, 꾸준히 달리고 있을 때 즈음 어느덧 마라톤대회가 성큼 다가왔다.
12월 10일, 한강시민마라톤대회. 새벽같이 출발하여 도착한 여의도역은 사당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주말 아침 사당역은 알록달록한 등산객들이 있었다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이곳에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검은색 옷에 배번호판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니 자연스럽게 대회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토록 많이 오던 한강이었는데 벚꽃도, 돗자리를 깔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없는 한강은 처음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강바람은 더 매섭게 느껴졌고, 주말 이른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이곳에 있으니 아 그냥 더 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이런 나와 달리 집합장소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활기찬 기운으로 모여있었고, 찬 바람을 헤치고 몸을 푸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 장면은 나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여태 모르고 있던 세계를 맛본 느낌이랄까? 활기찬 기운 속에 같이 뒤엉켜있으니, 새벽같이 출발해 도착한 나 스스로가 뿌듯했다. 조금 낯설고 어색하지만, 나도 친구와 출발선에 서서 사람들과 같이 몸을 풀었다. 아직 뛰고 있지 않음에도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출발 직전, 손가락을 다 같이 접으며 숫자를 세었고 출발! 하는 소리와 함께 출발선을 넘어 달렸다. 한강 옆에서 달려보는 것은 처음이라 몰랐는데, 아침에 뛰는 한강은 참 눈부셨다. 강한 햇빛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모자와 선글라스가 있어 이 강한 햇빛도, 매서운 강바람도 헤쳐나갈 수 있었다.
1시간 안으로 들어오자. 이게 나의 첫 목표였다. 나를 제치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와, 정말 다들 빠르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들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뛰니 중간 지점인 5km를 금방 지나쳤고, 58분 22초 동안 온 힘을 다해 달려 도착지에 들어섰다.
추운 날씨임에도 땀이 났고, 마지막에 쏟은 숨이 한꺼번에 토해졌다. 1시간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뿌듯함과 함께 짜릿한 감정이 들었다. 아마 마라톤 분위기에 빠져든 것 같다. 아침 일찍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뛰어보니, 왜 사람들이 마라톤에 열광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가 마라톤까지 나오게 된 지 말이다. 그저 달리기가 좋아서 시작한 취미가 어느덧 내 삶 속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으며 쌓아온 길들이 결국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12월 10일, 내 삶에 작은 부분일 뿐이라 생각했던 달리기가 깊이 자리 잡게 된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