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계속해서 산을 찾는 이유
20살,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던 시절에는 외국어로 쓰인 간판조차도 신기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방송마저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점점 그 환상이 희미해졌다. 이제는 여행 전날 짐을 챙기는 일이나 장시간 비행에 대한 부담이 먼저 떠올랐다.
800km의 스페인 시골길을 걸으면서 그 나라의 구석구석을 다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관광지에 대한 기대도 줄어들었다. 물론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는 건 여전히 경이로웠다. 괴짜와 천재 사이의 평가를 받았던 이가 이제는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보다 자연에 더 끌렸다.
순례길은 트레킹에 가까워 제대로 된 등산을 할 기회는 없었다. 이런 내게 웅장한 바위산 '몬세라트'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지만, 당장 가고 싶어 기차표를 예매해 떠났다. 비록 열차 표에 제한된 시간이 있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3km 정도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본 수도원과 바위산의 풍경을 잊을 수 없었다.
뜨거운 해를 마주하고 올라 힘이 들었지만, 짧게 등산을 다시 맛보니 산이 더 좋아졌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친구들과 여러 등산을 약속했다. 이제는 높은 빌딩보다는 푸르고 울창한 숲을, 사람으로 붐비는 도심보다야 질서 있게 길을 오르는 산이 더 좋아진 모양이다.
'악'산에 대한 여러 평을 들었다. 보통 악산이라 하면, 올라갈 때 "악!" 소리가 절로 나와 악산이 된다고 한다. 단풍이 절정인 어느 가을, 월악산 영봉에 오르기로 하였다. 오르면서 드는 생각은 사실 단풍은 산 아래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위로 갈수록 절정이었던 단풍이 저물고 발아래로 낙엽이 가득하였다.
그래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이끼가 가득한 계곡산만큼 힘들었다. 더불어 하봉, 중봉, 영봉이라는 봉우리 3개를 넘어야 했기에 보통 쉽지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긴 거리를 완주한 경험으로 이제 산쯤은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매끄러운 큰 바위를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올라서야 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낙상주의'와 '미끄럼주의' 경고판을 참 많이 보았다. 새삼 등산이라는 게 쉬워질 수 없는 것임을 다시 느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떨어진 단풍에 미끄러져도, 3개의 봉우리를 넘는 뿌듯함을 알려준 월악산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더불어 친구와 꿀맛 같은 김밥을 먹고 단풍의 절정을 보니 또 다른 산에 오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음 산은 가족끼리 떠난 제주도에서의 한라산이 되었다. 아쉽게도 가족 중에 등산을 함께할 사람은 없어 자연스럽게 나 홀로 등산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홀로 오르는 등산도 내게는 즐거움이므로, 또 다른 설렘으로 여행 짐을 쌌다. 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인 만큼, 방한용품을 꼭 챙겨야 했다. 어느덧 캐리어에는 등산 용품이 한가득 차지하게 되었다.
가을에 월악산을 오른 덕분에 한라산을 오르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겨울이 성큼 다가와 등산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을 헤치고 아이젠을 착용해야 하는 산은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기로 예정된 전날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 '설상가상'이라는 단어가 맞았다.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오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국립공원 알림에는 전면통제가 아닌, 중간에 있는 삼각봉까지는 오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설산에 대한 기대 없이 제주도에 왔는데, 무려 첫 설산이 한라산이라니! 행운을 얻은 것과 같은 기분으로,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새벽같이 택시를 타고 관음사탐방로에 도착하였다. 국립공원답게 길이 잘 닦여져 있어 평탄하게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한 새벽이라 그런지 곳곳에 눈이 조금씩 있었다. 아이젠을 처음 사용하였기에, 눈이 조금 많다는 기분이 들 때 아이젠을 착용하였다. 오르는 것에 집중하여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눈이 내 종아리까지 차 있었다.
설산의 첫인상은, 갯벌에 발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경사진 오르막이 더해지니 힘이 배로 들었다. 머릿속에는 아, 정말 세상에 쉬운 산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매일 2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도 5km 거리를 뛰는 것에 항상 숨이 찼고, 5km를 30분 안에 뛸 수 있어도 등산에서의 5km는 정말 달랐다.
다시 한번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게 쉬운 산은 없었다. 하물며 산의 초입인 아스팔트 들머리도 항상 어려웠다. 산은 내게 항상 겸손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다리가 푹푹 빠질 때마다 내 다리의 온전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나 처음으로 맞보는 설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이 모든 고생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난 한라산을 참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요즘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가 새삼 좋다. 멀리서 보면 그저 비슷한 초록색 산들 같지만, 막상 오르면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같은 산을 다시 오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산이 많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참 감사한 요즘이다. 산이 주는 여운을 곱씹으며, 나는 자연스레 또 산을 찾게 된다. 이런 끝없는 즐거움이라면, 계속 겸손하게 산을 오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