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의미부여
국경일이나 명절을 제외하면, 우리는 보통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만 특별한 의미를 두곤 한다. 하지만 그런 날 외에도, 조금은 유치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작은 선물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 마치 상술이라고도 불리는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처럼 말이다.
똑같은 하루도 이런 "데이"가 있으면 조금은 유치해도 낭만을 담아낼 수 있다. 때로는 삼겹살데이나 블랙데이를 핑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도 있다. 마케팅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날이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날이 주는 의미는 소소하지만, 그 소소한 의미가 쌓여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이벤트를 만드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나의 작은 이벤트는 '달리는 거리'가 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이 8일이면 8km를 뛸 것이고, 내 생일이 6월 6일이면 6.6km를 달릴 것이다. 의미란 부여하기 나름이었고, 그렇게 의미를 담아 달리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된다.
조금 지루하고 하기 싫은 날도 나만의 이벤트가 생기면 동기부여 되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달리는 것에 싫증을 느끼거나 권태로움을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상술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무슨 데이가 없다면, 일상이 아주 단조롭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은 유치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0km가 익숙해질 즈음, 더 긴 거리를 뛰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서울에서 열리는 하프마라톤을 알게 되었고, 4월 말의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결심은 쉬웠지만 라는 21.0975km 거리는 낯설고 막막했다. 아마 그 막막함은 아직 해보지 않은 도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봄이 오기 전, 이 하프마라톤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짧은 거리야 집 앞에서도 충분히 연습할 수 있고 부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거리가 길어질수록 긴 거리를 채우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조금 웃기겠지만, '마라톤을 위한 마라톤'을 알아보게 되었다.
마침 설날이 지나고 삼일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 애국에 큰 실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올해는 이 삼일절에 동기부여를 두고 싶었다. 유명 방송인이 이 대회의 수익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기부한다고 들었고, 나도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다 삼일절의 하프마라톤을 준비하게 되었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고, 눈이 자주 내리는 계절이었다. 처음에는 12km를 시작해 일주일마다 3km씩 늘려나갔고, 마지막에는 20km까지 뛰어보았다. 한꺼번에 긴 거리를 늘리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늘리다 보니, 어느새 20km를 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거리가 쉽냐고 물어본다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20km를 뛰어보니, 하프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느리더라도 오늘 뛴 것처럼 이 거리를 꼭 채워보자. 마음을 가볍게 여기니 뛰는 것에 부담도 생기지 않았다. 겨우내 열심히 달린 2월이 끝나고 3월 1일이 다가왔다.
마음이 가벼웠던 덕분인지, 아침에 늦잠을 잤다.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나니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다만, 그동안 조금씩 올라갔던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 있었다. 컨디션은 좋았지만 한강의 강바람을 생각하니 조금 주저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제시간에 도착한 대회장은 역시나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국기가 게양되고 있었다. 내가 삼일절에 뜀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끝으로 가슴에 올려둔 오른손을 다시 내렸다. 이후에는 준비운동까지 마치니 어느덧 출발선 앞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완주만 하자.' 가볍게 여기고 출발한 마라톤은 의외로 계속 속력이 붙었다. 아 오버페이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했던 우려와 달리 페이스는 떨어질 줄 몰랐고, 매섭게 느껴졌던 강바람이 이제는 날 밀어주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전에 20km를 연습하던 것보다 더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숨은 가빴지만, 지금 이 페이스가 버겁지 않았다. 어느덧 페이스메이커를 따라잡았고, 다음 하프마라톤에서의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속으로는 아 이런 게 러너스하이(*runners’ high: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나 행복감과 비슷하다.) 인가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힘들다는 기분보다는 개운하고 더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피니시라인에 들어와서도 가쁜 숨이 토해질지 언정 고통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지금 이 시간에 쉬는 날이라고 집에 누워있거나 늦잠을 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감사한 마음으로 21.0975km를 뛰었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난, 어쩌다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말이다.
나의 이 유치한 의미부여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삼일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작은 의미들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내게는 그 유치함이, 지금 이 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아직 이 유치한 의미부여에 뿌듯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한 번쯤은 의미를 담아보라 말하고 싶다. 오늘 하루 쯤은, 조금 더 유치해져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