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는 백일이 지나서야 제 몸을 스스로 뒤집었다. 세상에 나와 안간힘을 써야 한 가지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음을 세 달 만에 터득한 것이다. 제 어미가 뉘어 놓은 대로 있던 몸을 스스로 반 바퀴 돌려 모로 눕는데 만도 시간이 꽤 소요되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시 누워 있던 위치로 되돌리기 위한 라일라의 뒤집기는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아직 알아들을 수 없으니 말로는 가르칠 수 없었다. 힘들었을까? 라일라는 입을 시종 오무 락 거리며 바닥에 배를 깐 채 목을 치켜들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렇게 얼마간을 버티다가 핏기 몰려 벌게진 얼굴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듯이 방바닥에 쳐 박듯이 무거운 머리를 내려놓았다. 아이가 젖 먹은 힘을 다 쏟아낸 것일 진데 안쓰러움과 동시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라일라는 들고 있기에 힘에 겨운 머리를 치켜들고 좌로 돌려봤다가 우로 돌려놓다가 힘이 달리니까, 얼굴을 바닥에 떨구듯 내려놓은 것이다. 그것을 해내면서 라일라는 알 수 없는 본능의 소리로 킹킹거렸다. 냉혹하지만 그 또한 겪어내야만 할 일이었다. 제 엄마 아빠는 잠을 못 자가며 교대로 아이의 고개 돌리기를 도와주며 2주일간 아이의 몸 뒤집기 단계를 지켜보았다. 뒤집은 상태로 엎어져 자다가 질식하거나 침대 난간 살에 팔다리가 끼인 채 잠이 들 수 있기 때문에 부모는 온 잠을 잘 수 없었다. 세상살이 쉬운 게 없다는 것을 부모가 된 내 딸과 아가 라일라가 함께 배워가는 중이다. 아이는 사랑의 빚을 지는 중이고, 부모는 자기 부모에게 진 빚을 되갚는 중일 터이다.
무슨 일이든 첫 술에 배부르지 않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아기도 제 몸을 뒤집어야 길 수 있고 기어야 앉을 수 있다. 앉아서 균형 잡는 연습을 한 뒤라야 무언가 잡고 일어설 수 있다. 직립을 위한 단계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발을 떼기 전에 무릎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아 일어서는 연습을 거친 후에, 자신감이 붙으면 불안정하지만 직립의 세계로 첫걸음을 떼게 된다. 누구나 그런 과정을 습득하였지만 삶 속에서의 진정한 직립은 의외로 막막하다. 격동으로 요동치는 인생 판은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쓸어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부작용과 부조리를 늘 동반한다. 이 판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 몸만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Spirit, 건전한 Soul을 양 날개에 장착하고 퍼덕일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자카란다 꽃필 무렵에 라일라가 태어났다.
첫돌을 보름 정도 남긴 요즈음 아빠 손을 잡지 않고 고함을 치며 아장걸음으로 집 근처를 걸어 다니는 라일라의 동영상이 밴드에 올랐다. 땅 힘을 딛고 선 직립의 기쁜 함성일까? 스스로 만족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다리에 붙은 힘만큼 우렁찼다. 딸애의 말을 빌리자면 그 구역에서 가장 시끄러운 분이 되었다고 한다.
한갓 식물도 쉽게 꽃을 피워 내지 않는다. 모진 바람과 추위, 목마름 속에서 안간힘으로 살아남은 에너지를 응축하여 한 송이 꽃대를 밀어 올린다. 송이송이 숭고한 인내의 결정체가 꽃이다. 세상에 하찮은 것이란 하나도 없다. 때가 되어 꽃을 피운 거겠거니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야산의 들꽃 풀꽃이라도 귀히 여겨 볼 일이다. 그래서 손톱만 한 작은 꽃도 귀하다. 돌봄 없이 자라나 서로의 품을 넓혀가는 꽃들의 연대한 풍경은 속수무책으로 평화롭고 지순하며 감개무량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이 피워낸 아기 꽃은 거두절미하고 척박한 세상의 미래이며 기쁨의 부케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서 바로 서기란 만만하지 않다. 작은 꽃 무리 지어 피어난 들판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꾸려갈 아기들에게 어른들의 사랑은 넘쳐야 한다. 거친 세상살이에 휘어지고 부러진다 하더라도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손잡아 일으켜주는 사랑의 꽃밭지기가 되어야 하니까.
몸이 아팠던 탓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두려워 않던 남편이 라일라의 탄생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조금 더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아이의 미소로 화가 누그러지고 시시하던 일상에 탄력이 붙은 것이다. 웃음이 많아지고 아이가 신의 선물이란 소리를 입에 달고 있다. 자신의 쪼그라든 꿈을 부풀게 하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은 아기 꽃에게서 불어왔다.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사람의 마음에 봄을 부려 놓았다.
한국은 가을이지만 브리즈번은 봄이다. 눈부신 게 봄만이 아니었다. 브리즈번 강가에 봄의 전령사가 꽃구름을 띄웠다. 처음 본 자카란다 나무에 보랏빛 별이 수없이 매달렸다. 피 덩이 같은 라일라를 두 팔에 안았을 무렵에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한 달 사이에 강변을 바이올렛 빛으로 물들였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밤. 호젓하던 강변의 불빛이 비바람으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천둥치 던 나의 삶이 물결 위로 스러져가는 듯했다. 내가 바라보는 강가에 내가 머물고 있는 딸애 아파트에 천둥 번개가 요란했다. 야자수와 자카란다 나무가 어둠에서도 세차게 흔들렸다. 귀국 준비로 잠들지 못한 그 시간에 딸에게 전하고픈 마음을 엽서에 적었다. 딸애를 키울 때 기도하던 손때 묻은 묵주를 가져갔었는데 엄마의 마음 인양 엽서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나의 기도였다.
벼락 치던 밤이 지나고 난 아침, 비바람이 언제 불었냐는 듯 자카란다 나무는 꽃 잎을 수없이 잃고도 해맑게 살랑였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이 보랏빛 꽃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고요하라, 나의 마음이여! 이 나무들이 기도하고 있나니. (Be still, my heart, these great trees are prayers)” 통성 기도로 밤을 지새운 자카란다 보라색 별꽃이 우수수 떨어져 나무 밑동을 덮고 있었다. 나무 아래 땅 빛이 보랏빛이 되었다. 만개했던 자카란다 꽃은 천둥 번개에 멀리 달아나지 않으려고 애를 쓴 모양이다. 땅에 다시 꽃을 피웠다. 눈물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