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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 시료 채취를 위한 첫 면회

이등병에서 병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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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들 면회 가는 날이다.


정확히는 면회라기보다 6.25 전쟁 때 시신을 찾지 못한 큰아버지를 찾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시료 채취를 하기 위해 아들 부대에 방문하는 날이다.


아버지는 평생 살아가면서 마음속으로 큰아버지를 기다리셨다. 6.25 전쟁 때 참전하신 바로 위 형님이 전사하셨는데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헌병 군복을 입은 잘생긴 모습의 큰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때 상황을 자식과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군대에 간 아들이 태어나기 전) 1990년, 아버지는 우연히 신문에서 “6.25 전쟁 때 행방불명자는 부모나 형제가 국방부에 전사자 신청하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셨다.

아버지는 큰아버지 군번을 찾아서 곧장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에게 기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신문 기사 내용을 듣고 바로 국방부에 전사자 신청을 하였고, 다행히 군번이 확인되었다. 이후 여러 절차를 거쳐 국립대전현충원 위패봉안실에 큰아버지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위패봉안실은 시신을 찾지 못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영면을 기원하고 그분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위패는 석판에 계급 · 성명을 기록하여 보존하였다.


국방부에서는 할아버지(큰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직계존속으로서 연금 수령을 하지 않았는데, 연금 수령을 하지 못한 기간 동안의 연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 부모님께 물어왔다. 6.25 전쟁 이후로도 할아버지가 15년 이상 살아계셨으니 연금 수령액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형님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셨으니 연금을 받는 것보다 그 돈이 다시 국가를 위해서 잘 사용되었으면 한다”라고 하시면서 연금 수령액 전액을 국방부에서 꼭 필요한 데 사용하라고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정하셨다.


연금을 국가에 헌납한 이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연락이 오기를 “위패봉안실 새로운 판에 계급과 이름을 새겨 놓았다” 하면서 참배를 할 수 있다는 소식이 왔다. 아버지는 “형님의 유해는 찾지 못했지만 지금 이나마 위패라고 모시게 되어서 다행이다” 하면서 자식들에게 6.25 당시 상황과 현충일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셨다.

아버지는 현충일이 다가오면 자식들에게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하여 여러 말씀을 하셨다. “자식과 형제를 전쟁터에 보낸 유가족들은 돌아오지 못한 혈육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며 그리워한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나라에 바친 분들이 계셨기에 현재의 우리나라가 존재한 것이다. 현충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순국선열을 기리는 날이며, 우리의 후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에 희망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신병교육대대 입소식에 갔을 때 국방부 유해발굴 감시단에서 하는 호국보훈사업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6ㆍ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미처 시신이 수습되지 못한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국가적 차원의 호국보훈사업"을 듣고 아들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큰할아버지가 생각났다고 한다.


자대배치 이후 아들은 부대 상관에게 말씀을 드려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시단 시료 채취 신청을 하였다. 참여 대상은 6·25 미수습 전사자 친가 또는 외가 8촌까지 가능하고, 유가족 유전자 시료 채취 키트를 이용하여 구강 내 타액을 채취를 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래서 아들 부대에 방문하여 부대 위병소 근처에 있는 면회장소에서 시료 채취를 하게 되었다.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시신을 찾지 못한 큰아버지 형제)시료채취가 가장 정확하였지만, 그 당시 아버지는 부대에서 먼 광주에서 살고 계셨고 고령(91세)과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동하기가 어려워 나와 아들만 시료 채취에 참여하였다.


아직 큰아버지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이번 시료 채취를 계기로 언젠가 큰아버지가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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