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시들을 ‘장소’를 주제로 살펴본 결과, 장소로 우선 유정남의 「연꽃탄」에서는 ‘명덕상회’ 아버지가 연탄을 배달하던 리어카를 표현한 ‘바퀴달린 연못’ ‘구름의 언덕’ ‘잠자던 마을’ 등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화자의 내재된 기억 속에서 선택적으로 떠올려진 곳이며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들이 녹아 있는 사랑의 공간으로 표현된다 한편, 김석규의 「짚베개의 시」에서 장소는 과거의 사랑방과 연관된 기억들을 떠올린다 ‘호롱불 끄으름에 코밑까지도 새까매지는’ 추억을 중심으로 한밤중에 가는 ‘두부집’ 바람 자는 ‘대숲’ 등의 장소가 드러나며 이들 장소는 특별히 사랑방과 연관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따뜻했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다.
전민의 「김두환 지프」에서 화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선망의 눈길로 봤던 김좌진 장군의 집과 김두환의 지프를 자신만이 탔던 기억들을 되새긴다. 이들 장소는 기분 좋게 우쭐했던 추억과 연관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의 삶 속에 들여온다. 눈앞의 광경과 더불어 화자가 머문 장소가 매개가 되어 과거를 현재화하는 내용으로는 이춘희의 「거북이」에서 볼 수 있다. 화자는 현재 눈앞의 거북이가 있는 ‘진흙의 땅’과 ‘한 공기의 밥 아랫목’에 묻어두고 고개 숙인 과거 추억 속의 어머니의 모습을 소환하여 동일시 여긴다.
주영욱의 「층층나무」에서는 울진으로 가서 층층나무를 보면서 불현듯 기억의 층층으로 내려가 과거의 고향에서 만났던 단발머리 아이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황상순의 「운학동 돌무지의 비밀」에서도 현재의 눈앞에 놓인 돌무지를 보며 먼 옛날 평화롭고 아늑했던 작은 마을을 떠올린다. 다만 이근호의 「공간, 그 너머에·10」에서는 현재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행을 꿈꾸는 공간 이동을 바라는 화자가 나타난다.
위의 시에서 장소는 여전히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추억을 이끌어내고 과거의 즐겁고 행복한 기억을 소환하여 이를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위로를 삼거나 혹은 가슴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화자를 만나는 곳이다. 화자 스스로 선택한 과거를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특별한 장소와 이를 중심으로 잇달아 되살아나는 추억은 여전히 과거로 남아 있기보다는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소환되고 재기억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되고 기억되며 나아가 미래를 함께 살아가게 된다. 물론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소환된 과거의 기억들은 다시 그 시점에 적절한 현재화를 거쳐 재저장되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가 부여된 공간이 특별한 장소로 변화되고 그 장소가 선택된 기억으로 남으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하는 ‘시간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도 더불어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에 드러나는 과거의 추억이나 기억의 소환을 거치면서 온전히 과거의 사실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옷을 입고 있는 전혀 새로운 과거이며 또한 무수한 과거 사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과거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한편, 그 점을 깨닫는 일에서 과거의 사실은 이미 또 다른 현재가 되어 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래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함께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는 언제든 현재가 되고 현재는 또한 언제든 과거가 되는 준비기간이기도 하면서 또 미래로 나아가는 문이 되는 순환하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것이 생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