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길 위에 찍힌 발자국
하나하나 흙으로 덮으며
지운 그만큼 목판에 새겨간다
꽃다지도 노랗게 눈뜬 봄의 원화(原畵)
이따끔씩 쇄판(刷版)으로 찍어
마음 맞는 이들끼리 돌려가며
애틋했던 젊은 날들 추억하겠지
아픔도 있는 그림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웠다고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리라
밀물이 달려와 발목을 휘감아 붙들지만
이제는 떨치고 도망치려 하네
입고 있기엔 너무 무거운 인연의 옷은
이제 벗어버리려 하네
목판화 한 점
기쁨도 슬픔도 부조된
내 인생의 연대기
나, 떠난 뒤에도
비목처럼 남아 날 추억할까
-윤인경 「목판화」
과거를 지우고 지나간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시간들을 태워 없애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의 지배적인 감성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좀 더 긍정적이고 나은 삶을 꿈꾼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시간 역시 다른 이름의 공간에 불과하며 직관적 삶에 공감할 때 비로소 참다운 시간에 해당하는‘지속 즉 현재를 붙잡을 수 있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으로 남거나 혹은 기억조차도 해체된다 하지만 미처 해체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은 오늘의 일부로 재탄생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회상은 현재로 불러들인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는 새로운 현재가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이키는 기억에는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현재에 존재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구현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억에는 여러 이미지와 내용을 담고 있고 여러 시공간이 겹쳐져 있기도 해서 증강 현상을 표현한 한편의 영화처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이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되거나 혼융 혹은 증강 무순으로 오가는 복잡한 현상을 띠게 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나온 날들을 흙으로 덮으며 ‘젊은 날’을 추억한다. ‘들여다보고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공간 속에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과거의 일들은 이미 아픔도 있는 그림’처럼 객관화 된다
이는 현재의 상황에 함께 존재하고 또 밀물이 달려와 발목을 휘감아 붙드는 상황 속에 놓이는가 하면 그것은 ‘무거운 인연의 옷’이다가 화자가 떠난 미래의 시공간 속에서는 결국은 ‘비목’이 되어 버린다고 말한다 마치 젊은 날의 일대기가 기록된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공간 속에 펼쳐진 한편의 영화처럼. 기억 속의 과거는 현재화되고 현재화된 현재는 다시 시공간을 넘어 미래로 가서 이미 미래화 되어 버리는 시공간이 일시에 공존하다가 일순간에 지나가 버리는데 공존 및 해체를 한자리에 펼쳐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