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성묘 가는 길가에
강물에 지워진 애련의 기억들을
발자국 따라
잔잔히 그려놓은 묵객의 꽃
오일장에 갔다 아버님 돌아오실 때
밤하늘을 밝히던
별들이 꽃신 신고 내려와
대청호 길섶에 소근거리며 피는 꽃
달 걸음 따라가다 멈춰선 멧새가
숲속에 숨어 울다가 마주친
무네미 할매의 무덤가에
초연히 피어 있는 슬픈 영혼의 꽃
첫닭 우는 새벽 임이 남기고 간
무명수건에 고운 손을 씻으며
닦아낸 눈물
촉촉하게 젖어 있는 첫사랑의 꽃
-정근옥 「부채붓꽃」
플라톤은 우리의 영혼이 선재상태에서 미 선 의 거룩 같은 특정한 개념들은 마음속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유전적 기질은 물려받고 특별한 외부 요인이 없는 한 다시 유전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선험적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잃어버린 기억은 숨은 그림 찾듯이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복원된 기억은 본래의 사실과는 다르며 때로는 낯선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회상은 내면의 깊이를 다룬 자기고백이 되기도 한다. 눈앞 펼쳐진 시공간 속에서 오래전에 봉인된 유물처럼 생각한 기억을 풀어 헤쳐 현재화 하는 과정에서 굵직하고 중요한 기억은 남고 세세하고 낡은 기억은 털어내는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기억을 남기느냐 긍정적인 부분을 남기느냐에 따라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속에 묻힌 기억들을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러들여 현재화하고 이를 더욱 단단하고 구체화하여 미래의 시점까지 반복적으로 함께 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의 화자는 성묘 가는 길에 꽃을 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오일장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밤길을 밝히려고 길섶까지 내려와서 소곤대는 꽃, 할매의 무덤가에 피던 꽃 첫사랑의 추억을 담던 꽃으로 ‘부채붓꽃’을 떠올린다 자신의 눈에 든 꽃에, 화자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리며 지나간 기억에 감성을 더한 추억으로 퍼즐을 맞추고 있다. 부채붓꽃은 화자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문의 빗장을 여는 매개가 된다. 추억이란 되새김질할 때에도 여전히 아프거나 설레거나 할 때에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현재의 감정과 연속선상에 놓인다. 또한 다시는 눈길 손길이 가닿지 않은 과거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기억으로 해체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유한한 기억을 수없이 만들고 또 잊는다. 하지만 설레고 아팠던 시공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추억은 어느 한순간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겪고 생각하고 만든 기억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이 기억은 과거를 소환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시 현재의 시공간으로 돌아와서는 현재의 경험 느낌 가치관과 더불어 조율되거나 혹은 재편집하여 다시 기억의 공간으로 돌려보내거나 이를 중심으로 미래의 시간을 펼쳐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일들로 자신의 온 생애를 엮는다. 그 과정에서 기억된 과거는 다시 수정되고 현재화되고 미래화되어 그림자처럼 혹은 주도적으로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