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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시인 혜월당 Jun 30. 2023

이해인 쌀의 노래




나는 듣고 있네.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한 톨의 쌀의 노래      

그가 춤추는 소리를                

쌀의 고운 웃음      

가득히 흔들리는      

우리의 겸허한 들판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네.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희망을 안쳐야지                

적은 양의 쌀이 불어      

많은 양의 밥이 되듯      

적은 분량의 사랑으로도      

나눌수록 넘쳐나는 사랑의 기쁨                

갈수록 살기 힘들어도      

절망하지 말아야지      

밥을 뜸 들이는      

기다림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망으로      

내일의 식탁을 준비해야지      

-이해인, 쌀의 노래                         





도란 자연법이며 도의 범주는 신을 대신하여 우주의 본원이란 개념으로 정립된다. 상자연(常自然)으로 표기되는 도는 시대와 필요에 따라 변하는 성왕의 법이 아니라 항상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이다.(노자 16장) 그런데 이러한 자연의 법이 이 시에 나타난다. 이 시의 화자는 쌀 한 톨이 화자의 몸 안에 들어와서 화자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언급하는데 그 과정들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쌀 한 알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복잡한 상황은 질서와 규칙 속에 존재한다. 마치 카오스의 상황처럼. 한 톨의 쌀은 들판을 만나서 성장하면서 그 양을 불리고 추수 후에 밥하는 손길을 만나서 더 많은 분량의 쌀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자 준비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당연시 여기면서 밥상을 받지만 섭취하는 음식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도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큰 의미도 두지 않는다. 다만 음식을 얻기 위해 최소의 노력과 비용으로 최고 효과를 노리고자 애를 쓴다. 왜냐하면 먹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상당 부분을 먹고 마시는 점에서 확인하며 음식에 대한 자각은 곧 자기 내면 의식과 직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호의를 받는다면 우리는 상호성의 법칙에 따라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매일 접하는 밥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쌀 한 톨이 건네주는 감사함에 호의를 느끼면서 시의 화자처럼 쌀 한 톨이 주는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화자는 쌀 한 톨이 몸에 들어와 서로 구분 없는 물아일체가 된다. 이는 너와 내가 구분 없이 모두 함께 같은 근본 바탕에서 하나로 늘 그렇게 동화된다는 노자가 말하는 도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老子16장) 도란 텅 비어 있어 동시에 쓰고도 모자람이 없기에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므로 다함이 없다. 만물이 장대하게 성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화자는 아무리 살기가 팍팍해도 적은 분량이라도 나눌수록 넘치는 쌀을 닮아 넘치는 사랑으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화자에게 쌀은 본받아야 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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