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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매차

by 김지숙 작가의 집

강진매차康津梅茶



아무리 추워도 곁을 내어주지 않던 네게서 오늘은 초록 향기가 난다 내 입술에 내려앉은 너로 하여 내 가슴이 다 젖는다. 혀끝에 감도는 달큰하고 은은한 몽환 눈 내리는 날 다시 만난 너는 이미 내가 알아온 네가 아니다.


외로운 다산의 어두운 삶을 걷어내고 그가 걷던 길에서 만나는 맑은 약천. 어느새 가슴 깊이 들어와, 나의 숨소리까지 세는 너는 드문 기쁨이다.


고요히 순백의 평온으로 다조 앞에 선 너는 육과 혼으로 떨리는 내 가슴속에 있다. 넌 나이고 난 너인, 보이고 들리는 일체의 무념. 찻잔 속에서 되살아나는 어린 꽃잎들 모진 세상살이 끝내고 고결한 마음 전하는 신명 난 너의 신고식







첫 매화가 피던 때, 강진에 갔었다 다산의 삶에 마음 아팠던 나에게 강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우연히 산언저리에 핀 야생매를 만났다 아직 피지 않은 매화 가지들이 담 너머로 던져져 수북이 쌓여 있다

주인이 방금 잘라 던진 듯 싱싱한 가지에 오종종 꽃들이 달려 살아 숨 쉬고 있다 부지런한 주인이다 벌써 가지치기를 한 걸 보니. 아직 꽃이 남아있는 가지 몇 개를 데려왔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씻어 둔 꽃을 찻잔 하나에 한 개씩 넣고는 1-2분 정도 기다렸다가 마시면 그야말로 매화향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해는 이렇게 첫 매화차를 마셨다


다산의 매조도를 좋아한다 그래서 한 때는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사랑했고, 자주 그렸다


梅鳥圖 - 茶山 -

翩翩飛鳥 息我庭梅 편편 비조 식아정매

有烈其芳 惠然其來 유열기방 혜연기래

爰止爰棲 樂爾家室 원지원서 낙이가실

華之旣榮 有賁其實 화지기영 유분기실


훨훨 나는 멧새 한쌍 뜨락 매화에 내려앉네

매화 향기 진동하니 홀연히 그곳에 왔구나

거기 거처를 마련하여 부부가 즐겁게 살거라

꽃이 이미 만발하니 그 열매도 맺히게 되리라


다산이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고 10년이 되던 해에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빛이 바랜 다홍치마 6폭을 보내왔다 다산은 이를 잘라 두 아들과 후처의 딸에게 각각 족자를 만들어 주었다

위의 시 매조도에 실린 시는 딸이 시집을 잘 가서 훌륭한 남편과 아름다운 삶 보내고 후손도 많이 길러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라는 아비의 정이 넘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강지처인 아내의 치마폭이었고 이를 아내가 낳은 자식이 아닌 후처의 딸에게 남겼다는 점이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다산이 내 마음에 주는 흠결이 다

그나마 다홍 치마폭과 관련된 다른 글들은 다 사라지고 이것 하나만 남았다고 하니 세상 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자의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알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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