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나루
감동진
두물 헤어지고
세물이 만나 서로 통하는 자리
모여 들고 나뉘며 북적이는 큰 나루
대동수문 왕래하던 보부상은
화원상주 안동까지 소금 김 백합조개 장림 게젓 실은 배들이
낙동강 나루 불스그레 물길 여는 곳
지금 토사에 밀려 사라지고
거기가 여긴지 여기가 거긴지 맨둥맨둥 해거름이 시드럭하다
구포나루는 김해지역과 대저 구포지역의 물류를 운송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낙동강 유역 3대 나루터로는 경북 상주의 낙동진 나루터 경남합천의 율지나루터 그리고 구포의 감동진 나루터를 든다 조선시대부터 주요지역의 세곡을 뱃길로 운송했다
당시 물물교류가 왕성했던 구포장은 지금도 여전히 큰 장터를 형성하고 있다 구포(龜浦)는 범방산(泛舫山) 한 줄기가 낙동강 물을 향해 머리에 돌을 인 모습이 거북같다 하여 붙여졌다 범방산은 백양산(운수산) 줄기로서 강변 쪽으로 뻗어 내린 구포의 남쪽 구남마을 뒷산을 말한다 구포는 국가에 바치던 공물을 보관하던 조창이 세워지면서 형성된 포구로 예전에는 구법진 감동진으로 불렀다 ‘구법진은 감동창 앞에 있고, 나룻배가 있고(⌜경상도읍지⌟-양산군읍), ⌜해동지도⌟에는 감동창과 구법진을 함께 기록된다
조창은 조선중기인1628년 숙종 때 설치되어 전세 대동미 호포의 세 가지 현물을 조세로 징수하던 곳으로 삼세조창으로 불리었다 여러 고을의 곡식을 거둬 보관한 곳으로 남쪽 창고3간 서쪽 창고 4간 관할하는 좌기청3간으로 이루어졌으며, 감동진 (甘同津)에는 창(倉)이 설치되었는데 감동창(甘同倉) 또는 남창(南倉)으로 나와 있다 나라에 바치는 삼세(三稅) 물량이 조창에 저장되고 현물조세는 주로 남해 서해로 서울로 운반되었다
구포나루는 고대 제사를 지내는 굿하는 나루라 하여 굿개라고 불렀다 개는 개울을 뜻한다
『석전釋奠 기우祈雨 안택安宅』(1938년 조선총독부)에 보면 매년 혹은 격년隔年으로 이곳에서 별신굿을 지낸다 마을에 화재火災나 수해水害 또는 그 밖의 재앙災殃이나 질병을 막기 위해 지내는 제사의 일종이다 별신別神의 별別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여러 무녀가
앞 당산 골목이 남당산 여당산 님(主) 제물을 많이 잡수시고 동네의 집집마다 부귀공명이 있게 해 주시고 가뭄도 홍수도, 없으며 잡귀 잡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마을을 지켜주시라
는 주문을 외우며 춤을 춘다 별신굿은 당산제처럼 생활안정과 재화방지 성사를 위한 굿으로 복이 오고 재앙을 막으려는 염원을 담았다
감동진 나루 혹은 조창 중 가장 남쪽에 있다하여 남창이라고도 불렀으며 옛말에 갑우 거븨 갋으로 지금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말로 구포를 갑우내에 있는 개(나루)라고도 불렀다 이 지명은 구포가 낙동강 뼈대라는 의미이다
구한말 부산항의 무역을 초량객주와 하단객주 구포객주가 장악했다 낙동강 하류 일제의 최대 수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곳의 정미소 역시 도정되어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배와 육지 사이에 나무다리를 걸쳐 놓고 쌀을 옮겨가는 매다리가 있었다
1912년 최초의 조선인 설립 구포은행은 구포가 얼마나 번성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포는 구한말부터 광복 전까지 가장 번성했던 곳으로 영남최대의 상권을 형성했다
부산에서도 지역성이 강한 이 곳은 임봉래 김옥겸 윤정은 허치옥 김달수 박도백 윤경봉 윤장수 양태용 등과 노동자 농민 상인 점원 모두가 모여 기미년 31운동을 벌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제 시대부터 배와 딸기의 포구로 유명하다 해방 후에도 기름진 대저와 사상의 땅에서 생산된 포구이다 딸기가 익을 무렵이면 구포에서 사상에 이르는 강둑에는 딸기를 사고 파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배가 익는 가을철에는 구포 선창에는 김해 대저 출두리의 배를 사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구포장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등채소를 경작하면서 딸기와 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한때 구포나루 보부상들의 배는 낙동강 중류인 화원 상주 안동까지 갔다 명지 소금을 실은 배도 자주 드나들었으며 보부상들이 부른 구포선창노래가 있다 구포선창노래는 독창 혹은 제창으로 불리며 노동요가 아니라 특별한 후렴은 없고 구포나루의 풍경을 사설로 담았다
그밖에도 ⌜구포대리지신밟기⌟ ⌜판굿놀이⌟ ⌜정월대보름 달맞이행사⌟ 등의 민속요와 민속전승행사가 이루어진다
구법진 (仇法津)은 지금의 덕천동 교차로에서 의성산 일대의 구법곡 암벽이 있는 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구포 일대에 왜인의 왕래가 잦자 밀무역 하는 잠상潛商을 단속하려고 1710년 구포 의성 성터 남쪽 입구인 구법곡仇法谷에 수검소를 설치한다 그 당시 구법진에 기찰譏察이 생겨 찰방察訪이 감시선을 대기시킨 이 마을은 지금도 기찰이다
북구와는 참 오랫세월 인연을 맺고 살았다 구포나루는 구포 시장 건너로 생태공원 입구 쪽으로 가면 한쪽 켠으로 나루의 흔적이 남아있고 배가 서너척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몇년전까지만 해도 본적이 있다 그런데 생태공원을 정비하면서 그나만 어디로 가버린건지 알길이 없다
구포장은 북구에 사는 동안 자주 다녔다 특별히 살 것이 있어 가기 보다는 구경하러 다녔다 사람이 너무 많아 휩쓸려 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곤 했다 어물전 과일전 본래 시장 식당골몰 약초골목 옷전 골목등 꽤 여러 골목으로 나뉘는데 나는 주로 새벽 기차를 타고 물건을 파는 할머니들이 자리잡은 한가한 뒷골목으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곳에는 마트나 다른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자기들 딥에서 직접 지은 물건들을 팔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속에서 파는 노전 국밥이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 상인들 틈에서 노전 국밥을 먹어 본 적이 있다 한 겨울 구포장터에서 먹은 국밥은장터국밥이라는 한편의 시를 안겨주기도 했다 구포나루는 사라졌지만 구포시장은 아직도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유는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교류가 그리운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