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도 보고 싶은 바다, 통영統營
-백석 박경리
생사를 떠나 꼭 한번 만나고 싶은 백석은 일제 강점기 속에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말과 언어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에 사용했던 멋진 시인이다 고향 친지 가족에 대한 의식 또한 남달랐다 민속적 서사로 혹은 음식 평안도 사투리로 평화롭고 정신적인 안식을 갖는 공동체 의식을 통해 훼손된 고향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한편, 가족 사회 민족 공동체적 삶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던 시들은 어두운 시대에 별이 되어 빛난다
그분의 시비가 왜 통영 명정골에 있는지 의아했다 평안도 출신이고 서울에 연고가 있어 그곳에서 살다가 월북한 줄 알았다 하지만「통영」시를 읽으면서 여인‘난’과의 이야기를 알고 그녀를 만나러 통영에 가면서 이곳 명정골과 인연을 맺었다
명정골은 충렬사 앞에 일정日井과 월정月井두 우물인데 日月을 합쳐 明을 가져와서 명정明井골’이라 한다 명정골은 ‘난’이 살던 곳이다 시에서‘정담샘’이라는 우물터가 있고 이곳에서 ‘난’이 빨래를 하던 곳이며 그분이 ‘난’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분은 명정골을 세 번 방문한다 첫 번째는 그녀를 사람하는 마음에 품고 아쉽게 돌아왔고 두 번째는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세 번째 찾아가 부모님께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하던 연유로 사랑하는 여인 ‘난’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로 떠나고 여인과 벗을 잃은 배신감에서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
내가 통영 명정골을 찾게 된 동기는 이곳에서 그분의 통영에서 가졌을 그 마음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충렬사 앞 도로를 가르는 맞은 편에 시비가 있다 마치 홀로 왔다 홀로 떠난 그분의 뒷모습처럼 쓸쓸하다 일과 월을 상징하는 명정우물은 이제 더 이상 우물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오가는 발길은 가끔 느끼나보다
그분의 「통영」시에서 나오는 객주집은 더 이상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세 번째 쓴 통영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에서 시인은 ‘통영장’을 구경하며 품바타령을 듣고 통영과 미륵도 사이에 나 있는 작은 해엽인 판데목을 지나기도 했다 ‘판데목’은 물이 들면 섬이 되고 물이 나면 육지가 되는 미륵도를 잇는 나들목인데 이곳을 통영의 목이다 이곳을 틔우면 통영이 흥한다고 통영사람들은 이곳에 다리를 놓았고 일제때 해저 운하를 만들었고 지금은 충무교가 서 있다
이곳을 걷다보면 사랑하는 여인‘난’에게 청혼을 거절당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가버린 여인에 대한 생각을 접었던 착잡하고 차분한 심정이 느껴졌다 당시 서울에서 통영까지의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든 열정은 ‘난’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그 마음이 잘 나타난다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 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는 내용이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 「여우난 곬족」에 감동을 받고 그분처럼 시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자라고 살았던 내 고향에 대한 생각을 돌이켜 그분의 시를 읽은 답시를 썼다 그 시가 「고랑할매」이다
명정골과 인연이 깊은 또 한분은 바로 박경리 선생님이다 그분의「토지」는 하동의 최참판댁이 배경이라 그분의 고향은 하동인줄 알았는데 통영 명정골이 생가터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그분은 명정골 외가에서 태어나 서울로 결혼하여 떠났다가 원주에 살면서 6.25가 터지고 남편과 아들을 잃고 설운 마음을 달래고자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다
처음 서울에서 돌아와서는 서문고개 부근에 살았지만 후에, 명정골 공덕귀여사의 건너편 외가이자 생가터에 살았다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는 말을 한다.
6.25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서울에서 다시 통영으로 내려와 살면서 딸의 담임과 결혼하면서 온갖 악소문에 시달리다가 결국 통영을 떠나 다시 찾지 않았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50년 세월을 고향을 찾지 않고 살다갔을까 그분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다
명정골은 「김약국의 딸들」에서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는 내용들이 작품의 배경이 된다.
「토지」의 일부 배경에 ‘특히 서문 안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 충렬사는 자리하고 있었다’라고 하여 명정골을 배경으로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분이 쓴 「토지」는 워낙 대작이라 긴 세월을 두고 쓰였기에 매번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읽은 적이 있고 tv드라마도 원작과 비교하면서 빼놓지 않고 봤다 그분의 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이유를 알았다 삶의 굴곡이 이처럼 심하고 보통 사람으로는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써 왔기에 그 삶이 우러난 글이었던 것을 알면서는 그분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놓을 길이 없었다
물론 그분에게 명정골은 정신적 고향이자 잊을래야 잊히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 작품에 명정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예전 「토지」에서 언급되는 가난한 초가는 더 이상 명정골에서 찾을 길 없다 당시를 재현하지 않았지만 명정골 걷는 길은 표지석에는 육필 원고가 있고 ‘명정골 우물’과 ‘충렬사’에 대해 언급한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음력 이월 풍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안의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고 하여 명정골의 풍습을 언급한다
그분의 육필을 본 것만으로도 뭔가 힘을 느꼈다
그분은 작품에서 얼마나 세심하게 이 마을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를 직접 가 보는 것 만으로 더 잘 이해게 된다 기념관은 외관이 아주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입구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상석 위에 책을 펼치고 선 그분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통영과 관련된 글귀를 새긴 문장비가 있다 박경리 선생의 생가터를 끝으로 통영 문학기행을 끝내야 했다
참고시 3편
백석 「통영1」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박경리 「삶」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끓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럼타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백석 「여우난 골족」에 대한 답시
혜월당 「고랑할매」
내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는 방금내린 산(山)물이 고랑을 끼고 흘렀다. 박조각 도토리 깍데기로 고여 든 물을 퍼서 흙고물을 반죽하여 파초 잎에 담으며 놀았다.
고랑이 끝나는 길목에는 무허가 판잣집에 할매 홀로 살았다. 철길 옆 빈터에서 고물상하던 남자의 본처였지만 자식을 못 낳아 소실에게 밀려 났다.
소꿉놀이가 시들할 즈음 고랑가에 살던 할매가 궁금했다 돌멩이를 할매 지붕에 던지고 산물을 끼얹어도 할매는 큰소리 한번 치는 법이 없이 서릿발 하얗게 앉은 머리를 쑥 내밀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오가는 길에 판때기로 짜 맞춘 느슨한 문틈 사이를 슬며시 들여다보면 할매는 팔을 뻗어 커다란 대침을 쭉쭉 당겨 낮은 천장에 닿을 듯이 이불을 꿰매고 다 쓴 전구알을 넣은 채 떨어진 양말을 기웠다. 우리들 중 아무도 할매를 이웃으로 보지 않았다.
잔치 떡 생일 떡을 돌릴 때에도 할매는 늘 빠졌고, 커다란 솥에 잔치국수를 삶아도 할매를 부르지 않았다. 할매에 대한 이방감은 늘 당연했다
늦은 밤. 떡을 먹고 신열로 온몸이 젖었던 나는 가슴이 콱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병원이 너무 멀고, 그날따라 약국아제는 타지로 나가고 약국 불은 꺼져 있었다
엄마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름등을 켜고 밤늦도록 바느질을 하던 할매의 판자문을 엄마는 와락 열었다 어느 틈엔가 나는 할매의 커다란 대침아래 꼼짝없이 뉘어졌다
안경너머로 바라본 할매의 실낱같은 눈 나는 할매를 힘들게 햇던 지난 날들을 진정으로 후회했다 희고 긁은 실로 양엄지를 챙챙 동여매지 시꺼먼 피가 몰리고 할매는 나의 양 손톱밑을 사정없이 찔렀다 검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할매는 내 가슴과 등을 한동안 쓱쓱 쓸어내렸다
할매의 눈고랑을 흐르는 산물같은 외로움을 그때 처음 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문학인들의 생가터와 집필실 작품과 관련된 장소들을 돌아보면서 작품 속의 장소와 그분들의 마음을 되짚어 공감하면서 나름의 <답시>로 그분들에 대한 여러 마음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나만의 문학 지도를 머잖아 완성하게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