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배
굵지도 잘지도 않은 명지백사장에
커다란 가마솥 걸어 마른
갈대 장작 삼고 강바람 바닷바람 서로 도와
다보록 피는 자염최성자염
조선최고부자 소금장수 김생도의 전오염이
수라상에 올라 또랑 하니 제 맛 내고
새우젓 소금 조랑조랑 실어
구포 남창나루 뒷기미나루 나루밤마리 현풍 안동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와 맞바꾸던 나볏한 소금배
나루는 백제의 도읍지였던 웅진熊津을 곰나루라고 칭한 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 나라와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 나루는 고대의 국가가 나루를 중심으로 부족 간의 교류와 중개 등을 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추측한다 또한 나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渡 津 浦 港이라는 말 등과도 유관하다 대규모 바다를 안고 있는 곳은 항 제법 큰 곳은 포 군사시설이 있는 곳은 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나루는 물을 이용하는 교통의 요지였지만 교통수단이 변화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갔다
소금배는 한때 명지나루를 가득 채웠다 명지 소금이 유명세를 이룬 것은 천주교 탄압으로 김해로 유배온 이학규의 묘사에서 읽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남쪽에 큰 산록이 있어 채소와 땔감을 이루 다 취할 수 없고 동쪽에 넓은 호수가 있어 물고기와 새우, 게와 조개 등을 이루 다 먹을 수 없다 갈대가 있는 이점으로 광주리와 삿갓을 만들고 배의 노를 저어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데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물린다 무릇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영남의 속담에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 좌로는 울산이요 우로는 김해""라고 말한다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던 명지염전은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삼각주에서 기온이 높고 건조하고 바람이 잘 부는 극성으로 가능했으며 겨울도 염전에서 일할 수 있었던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명지염전이었다 정약용은 명지소금이득이 나라에 제일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이곳은 염전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고 소금배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없어진 것이거나 그 전후로 사라져서 지금은 아파트 촌이 되어 어디를 둘러봐도 아파트가 있을 뿐이다
봄이면 유채꽃에 밀려난 갈대들이 강가를 지키고 있다 갈대를 베어내고 유채를 심은 낙동강 주변이나 을숙도 핑크뮬리가 있는 황산공원 풍경 역시 여전히 어색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을 빠른 속도로 바뀌어가고 소금배를 세워둔 포구 대신 요트 계류장이 서 있는 낙동강 포구를 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키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