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는 잊지 못하는 세 권의 책이 있다 그 첫번째는 언니에게서 받는 동화책이다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내게 그 책의 제목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 책은 동화책이었고 책속에는 여러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짐작하건데 신지식의 동화집『안녕하세요』이었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국민학교 다닐 즈음이었고 크리스마스날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선물포장지에 싼 책이 한권 있었다 국민학생이라 정말 산타가 다녀간 줄 알았다 언니와 한 방을 사용하던 내게 자신은 모른다며 아마도 산타가 주고 간 것같다기에 당시에는 정말 산타가 있는 줄 알았다
어릴 적 나를 회상하던 친구말이 자기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진 집은 우리집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튼 당시 어린 나로서는 교과서 외에는 별달리 어린이가 접할 수 있는 책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 산타의 선물이자 언니가 사 준 그 첫동화책을 읽고 또 읽었다 끝내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책은 언니가 용돈을 모아 사주었던 게 아닐까 지금도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이후로 고학년이 되면서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었던 언니 오빠 덕분에 점점 높은 수준의 책들을 미리 읽었다 책장에는 을류소년문고판 책들이 꽂혀있었고『새소년』지들도 이따금씩 보게 되었다
두번째 책은 오빠가 사 준 책이다 오빠는 아주 스케일이 컸다 당시만해도 고등학생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이나 중1이 채 안되던 겨울 정도인 셈이다 어문각의 『신한국문학전집』이었다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황토빛에 가까운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시 소설 평론 시조 등이 함께 하는 꽤 많은 권수의 책 상자가 배달되어 온 기억이다 가슴이 너무 너무 벅차올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고 책더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너무 행복했다 오빠는 가진 돈이 없으면서 엄마 몰래 할부로 끊어서 의논도 없이 일을 저지런 오빠를 엄마가 말로만 혼을 내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의 짜장면 한그릇 가격이 30원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책한권에 1500원이고 50권이면 75000원이라는 거금을 지른 오빠의 통큰 행동은 우리집 누구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별탈없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단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이 자랐기에 유달리 총명했던 오빠는 이미 엄마의 성품을 간파하고 겁없이 책을 사들인 행동을 감행했던 모양이다 하나뿐인 여동생에 대한 사랑도 유별나긴 했지만 그 여동생이 책을 너무 좋아하니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자신도 고등학생이 되다 보니 참고로 읽어야 할 문학작품이 필요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한문으로 된 책과 세로로 쓰여진 옛날 책들이 아버지의 책장에는 가득차 있어서 달리 문학전집을 꽂을 데가 없어 한동안 거실 한켠에 쌓아두기도 했다
나는 이 책들을 밤낮으로 쉼없이 읽고 또 읽었다 아니 흡입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 놀기는 커녕 학교에서 오면 곧장 책일기에 바빴다 특히 시집은 읽고 또 읽고 수십번을 읽었던 기억이다 평론 부분은 어려워서 그냥 쉬리릭 지나쳤던 기억이다 지금에서 내가 그 평론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후 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전집인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헷세도 알게 되었고 헷세의 데미안 청춘은 아름다워라 수레바퀴아래서 유리알의 유희 싯다르타 크눌프 페터 카멘친트 등과 같은 작품을 읽었다 헷세의 시와 소설은 정말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었고 꼭 독일에 유학을 하고 싶었다 당시의 꿈은 그랬다 헷세의 삶을 따라 살고 그곳에서 나도 그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었다
세번째 책은 중1때 담임선생님이 추천하고 보여준 정음사에서 출간한 윤동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매주 월요일이면 칠판 한켠에 윤동주의 시를 한편씩 칠판 한켠에 써두고는 어떤 시간에도 닦지 못하게 하셨다 덕분에 윤동주 시를 외우게 되었고 그 시집은 사기 위해 용돈을 모으고 끝내 1학년이 끝날 무렵 그 책을 샀다 처음 내돈으로 산 첫 책이었다 그 책을 책장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었다 헷세에서 내마음이 윤동주로 완전히 돌아섰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기라 그런지 나는 그 시집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꼭 만나고 싶은 1순위 시인으로 지금까지도 자리매김되고 있다
동주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알고 싶었고 그에 관한 것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찾았지만 없었다 다만 책 뒷면의 서평 추억과 관련된 윤일주나 그 밖의 사람들이 한 말들을토대로 그의 삶을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연변으로 가서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시를 썼던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가끔씩은 꿈에서도 윤동주를 만나기도 했다 여러번 이사를 다니면서 자연 책들이 사라지면서 아끼던 책 을 잃어버렸다
이후 수많은 책들은 나의 주변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을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도서관에 살다시피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니 하면서 다른 것들은 솔직히 눈에 들지 않았다 읽을 책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학교 공부는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좀더 늦게 책을 알았더라면 학교 공부는 더 잘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더 똑똑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며 현실 세게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이 세 권의 책으로 세상을 좀 덜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