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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파

by 김지숙 작가의 집

냉파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한 지는 이제 보름이 넘었다 추석을 지내면서 준비해 둔 음식들이 냉장고를 꽉 채워서 이제는 당분간은 계란이나 콩나물 기본 조미료 외는 가급적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지내려고 마음먹었다 대체 얼마나 먹어야 냉동실이며 냉장실에 가득한 이 음식들을 다 먹어 낼 수 있을까 김치도 야채도 고기들도 너무 꽉꽉 차 있다

어제는 결명자차를 다 마시고 홍차를 먹기 시작했다 얼그레이 홍차는 약간의 단맛을 넣어 먹기를 좋아한다 때마침 계란이 떨어져서 동네 마트에 갔는데 예전에는 이것저것 막 담았지만 이제는 부산으로 돌아갈 날들이 가까워지면서 냉장고 비우기를 시작했다 아직은 빠른 감은 있지만 그래도 늦은 것보다는 낫다 싶어 그냥 추진하기로 했다

과연 나는 냉장고를 얼마나 잘 비우고 얼마나 적은 양의 짐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버리고 먹고 치우기에 여념이 없다 냉파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걸리는 정리정돈 작업에 속한다 먼저 냉장실의 야채부터 먹어야 했다 파프리카며 셀러리 콩나물두부 계란 브로콜리 가지 오이 양파 등은 언제나 야채실을 꽉 채우고 있고 없으면 늘 불안하여 마트에 가면 꼭 사두게 되는데 요즘은 그것도 개 소 보듯이 지나친다 계란은 매일 한알씩 수란이나 프라이 계란국 계란오믈렛 등을 해서 먹기에 떨어지면 안돼서 계란만큼은 잊지 않고 냉장고에 두고 있다

냉동실에는 지난 추석에 사둔 닭다리살 쇠고기 조기어묵 등이 있어 제법 자리차지를 하고 있어 부지런히 닭볶음을 하고 카레에도 닭을 썰어 넣어 냉동실을 파먹고 있다 냉동파 냉동부추 냉동 양파 냉동당근 등 수시로 사다 두었던 냉동실 야채도 이제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간보다 큰 냉장고가 한개 조금 작은 냉장고가 한개 그렇게 두 개라서 한참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영양면에서 비비타민 단백질 탄수화물등 영양의 균형을 맞춰 먹는 터라 야채 과일이 제일 먼저 바닥이 났다 기장 즐기는 야채 과일이 바닥이 나자 뭔가가 빠진 느낌이라 할 수 없이 냉파 도중 야채를 주문해 먹기로 했다 냉동파를 다 먹어서 파 대신 얼린 부추를 넣고 계란전을 부쳤더니 그다지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추를 다 소비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생각으로는 냉장고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들을 다 먹고 난 뒤에 뭔가를 사고 싶었지만 내 생각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현실이고 함께 사는 사람이 원하는 식탁도 있으니 일부 양보하면서 융통성 있는 냉파를 계속하기로 했다

아직도 닭다리살이 남아 있고 고기도 남아 있다 낚시해서 잡은 전갱이무더기는 제일 먼저 구이로 먹고 쇠고기는 미역국 쇠고기 국을 한두 번 끓이면 끝이 나겠고 닭다리살은 닭조림을 하거나 카레에 넣어 부지런히 먹어야겠다 냉파를 하는 동안은 요리에 숙연해진다 냉장에 있는 내용으로 요리를 하기 때문에 생각도 많이 해야 한다 그래도 한 번씩은 이런 저런 방식의 새로운 창작요리를 만들게 된다

완전한 냉파를 위해 다양한 조합을 생각하게 되고 많은 생각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친다 나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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