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판암
당나라 태화사에서 공부하던 원효가
큰 판자에 ‘해동효척판이구중’을 써 절 상공에 띄워
장마로 산사태에 매몰될 승려 구하자
이들이 원효 찾아 도를 깨친다
천명의 성인이 나온 자리라는
천성산 아래 큰 바위에 걸쳐 앉은
장안사 산내암자 척판암
저분저분한 이적의 절에는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이 석가모니 사리만
고즈넉이 봉안되어 있다
당의 태화사에서 공부하던 원효가 장마로 산이 함몰되어 죽을 운명에 놓이자 큰 판자에 曉擲板而救衆이라는 글씨를 써서 허공에 던지니 뒷산은 무너졌으나 대중이 모두 살아난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모두들 원효가 도를 깨우친 자라 하여 그를 따라나섰다 원효가 자리 잡은 이곳에 그의 이적을 기리기 의해 절 이름을 척판암으로 부르고 되고 참선수행자들이 이곳에 머문다
척판암은 극락전 용왕각 산신각 등이 있으며 삼층석탑이 정 마당에 있는데 석가모니불 사리 다섯 과가 봉안되어 있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아서인지 절마당은 다른 절보다 조금 협소하고 건물들이 붙어있는 정도이다 장안사의 부속암자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독립사찰이 되었다
장안사를 거쳐 백련암을 사이에 두고 척판암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오솔길은 15분 거리이며 오른편길은 20분 차로 5분 정도로 걸리는 고부랑길이다 주차장은 좁아 백련암에 두고 걷는 편이 좋다 제일 먼저 반딧불이라는 이름으로 척판암 해우소가 우리를 맞는다 척판암 법당 좌측으로는 원효대사의 진영이 있고 벽에는 측판과 관련된 벽화가 있다 원효대사를 마중 나온 산신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벼랑에 얹힌 듯 지어진 산신각에 이르는 길도 계단으로 장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다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산신각을 앞에 두고 간절한 기도를 한다
바위산 아래로 좁은 공간에 어렵사리 앉은 척판암에서는 왠지 모를 원효의 기운이 느껴진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산비탈 벼랑에 자리하였는지 높은 곳에서 아래에 사는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기도하기 위해서인지 암튼 척판암을 뒤로하고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오면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절간의 느낌을 갖고 하산길에 나섰다
한국불교계의 고승 원효는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중앙귀족에 속하는 경위 11등 관등인 나마를 소지한 자이다 15세 전후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특정한 스승은 없이 당대 고승을 두루 만나 교류하며 영향을 받는데 주로 대승적이 중생구제가 목적이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그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고부터는 이후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는 이름으로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데 이는 불교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려는 이유에서이다
화엄경의 구절에서 따온 무애가無碍歌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여 춤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애쓸 뿐 아니라 일생동안 90부 200여 권의 저술을 했다 간결하고도 유려한 문체로 조리 있는 점 종파나 경전에 집착하지 말고 조화와 통합으로 참된 진리를 추구하려는 점이 특징이다
분황사에는 그의 유골이 있다 아들 설총이 뼛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소상塑像에 절을 하니 돌아보더라는 말이 전한다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적을 행한 스님인 만큼 달리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 설총은 죽을 때까지 공경의 예를 올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원효와 같은 고승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라는 그의 말처럼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원효사상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은 모두 불성이 있고 그 불성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근원은 일심이며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에서 보면 구현된 세계가 정토이다 일심은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와 현상적인 생멸이 다르지 않다는 그의 사상은 이 둘이 둘이면서 하나라라는 일체 유심조 사상의 근원이 된다
분황사를 예사롭게 봐 욌는데 기회를 만들어 다시 한번 원효의 소상을 만나볼 참이다 일체 유심조 사상을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가슴으로는 이해가 부족한 나를 돌아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