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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주이

by 김지숙 작가의 집

넝마주이




골목길 끝나는 산언저리

헌 옷 폐지 고철 구리 사이다병 깡통 모은

큰 망태기에서 하나둘 풀어놓은 마당은

북에서 피란 온 넝마주이 아재가

주운 물건 갈무리하는 삶터

가득 쌓인 폐지에서 튀어나온

말 부스러기 멍털멍털 품위 던진 양심

단숨에 낚아채어

기후 살리고 오염 낮추고 물 사용 줄이는

별 것 아닌 듯 별 것 찾아

자원 순환 이끄는 익숙한 몸놀림 이른 새벽

부지런한 천 씨 아재의 맷맷한 아침이 깬다



넝마주이는 지금으로 치면 재활용이 가능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다가 고물상에 내다 파는 사람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이 넝마주이는 한 곳에 사오십 명이 거주하며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사에 살면서 주로 망태기와 집게로 일을 한다

1950년 전후에는 큰 광주리나 망태기를 지고 그 안에 폐품을 넣어 다녔기에 망태기할아버지나 넝마주이 아재라고도 불렀고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넝마주이일을 하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를 양아치라고도 했다 이 일은 1962년부터 사회적 차별과 정부의 감시를 받으면서 근로재건대라는 직업으로 등록을 해야 했고 등록하지 않고 하는 경우에는 경찰에 의해 감시의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인 흐름 속에서 2000년이 들어서면서 넝마주이는 시대적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폐지 줍는 노인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요즘은 고물상들이 곳곳에 있고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정부업체가 있고 다양한 경로로 재활용품들이 수집되고 버려지기 때문에 자연히 사라지는 직업이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에서도 이 넝마주이 아재가 있었다 여러 명이 있었지만 기억나는 사람은 커다란 망태를 등에 짊어진 그다지 늙지 않은 사오십가량의 그 당시 나이로는 중늙은이였다 요즘이야 사오십이면 청년이지만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창 골목을 누비며 동네 대장을 하고 그 이후 세대들이 똘마니 노릇을 하며 놀던 그때에는 넝마주이는 하루에도 서너 번은 골목을 돌아다니곤 했다

등에 업힌 아이들이 칭얼대며 울면 엄마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넝마주이가 알고 와서 아이를 데려간다는 거짓말로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도 하고 그런 말들을 수 없이 들으면서 자란 시대였다 내가 아는 천 씨 아재는 산동네에 사는 이북에서 전쟁통에 혈혈단신으로 피란 온 아재였다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식구들만 남겨두고 홀로 피란 왔다고 들었다 그리고는 이곳에 정착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나서 전쟁고아들을 한 둘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중 한 아이가 친구의 친구로 우리와 같이 놀곤 했다

당시에도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함부로 다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싫어했고 집 앞 골목을 벗어나면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아이들을 잡아가서는 밥을 굶기고 동냥질을 시키거나 넝마주이일을 하는 양아치가 될까 항상 아이들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 물론 엄마들마다 성향이 달라서 어떤 엄마들은 아이가 있건 없건 밥시간이 되어도 오건 말건 신경을 쓰지도 않고 일하러 다니는 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는 그나마 엄마들이 대체로 다 집을 지키고 있었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엄마들이 많았다

넝마주이아재의 넝마는 너무 크고 튼튼했다 어린 눈으로 보면 아이들이 서넛은 들어가게 생겼다 그래서 넝마주이 소리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치는 아이들에게 넝마주이 넝마는 곧 엄마와 집과 가족들로부터의 이별을 뜻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넝마주이의 넝마는 요즘 세계여행을 들려주는 TV화면 속에서 열대 과일을 담기 위해 일터로 가는 사람들의 등에서 본다 망고며 두리안을 담아 등에 지고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 넝마주이의 넝마진 뒷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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