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zone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오늘 시』



수렵-zone




열쇠를 잃어버린 날은 세상이 하얗다

노트북, 텅 빈 머릿속까지 열어 본다

통나무 속 파듯 뇌세포를 몽땅 꺼낸다.

동굴 속에 남은 알곡들이

실타래처럼 하얗게 뒤엉기고 추위가 풀린다

고사리 번성한 돌 틈 사이로

음울한 습기가 실마리를 잣는다

원시의 강을 지나 움집 마지막 자락에

깊숙이 손을 넣어 뭉클뭉클

그들이 사는 세상의 끝을 만진다

'어디에 두었니'

젊은 원시인이 돌칼로 위협한다

'모를 일이다'

슬며시 상형문자 새긴 돌열쇠를 건넨다

원시의 숲에서 조개 목걸이를 걸고 사냥하던

한 여자가 무스탕 벗으라고 손짓한다.

수렵-Zone 벽화 속에서

열쇠를 찾은 날은 음식을 잘못 먹어 늘 배탈이 난다.




오래 전에 언양에 있는 반구대에 갔었다 그때만 해도 개천에 물이 없었고 특별히 들어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아서 벽화를 가까이서 바라보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 보기도 했다 시루떡처럼 켜켜로 쌓인 반구대 암각화는 정말 특별했다

오랜 세월 이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의미가 깊었다 아마도 해설에 따르면 1만여 년 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어로와 수렵에 관한 정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림 언어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그저 시대적 상황으로 짐작할 뿐이다 돌에 칼로 새겨 넣은 그림 언어를 해석한다는 것은 정말 해박한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냥 나 나름대로 해석해 봤다 멧돼지 사슴 호랑이의 모습과 고래도 표현되어 있었다 솔직히 해설하는 사람이 그렇더고 해야 겨우 알아볼 정도로 힘들게 보이는 부분이 더 많았다 선사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는데 큰 의미를 둔 암각화

하지만 나는 암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은 있다는 것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면서...


난 뭐 하나에 빠지면 꼭 다른 것을 잃어버린다 암각화를 보느라고 자동차 키를 암각화 보던 어느 언저리에 두고 왔다 그것도 한참을 걸어와서 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생각이 났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리들은 먼저 떠나고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니 그 사이에 물이 조금 들어와 있었다 급하게 열쇠를 찾느라고 신발에 물이 조금 들어간 줄도 모르고 물길을 건너 열쇠 꾸러미를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다시 수렵하는 반구대의 그림 언어를 한 번 더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림 언어 속에 있는 선사인들과 눈을 맞추게 되었다 그들의 바람이 내게 전해져 왔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어떤 남자가 마치 벽화 속에서 특 튀어나온 듯이 꾸러미를 건네며

'이걸 찾아요?' 한다

나는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열쇠 꾸러미를 받아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신경을 써서인지 신경성 대장염이 재발을 했다 결국 순간적으로 마음을 쓰는 날은 꼭 그렇게 탈이 난다 이 시는 그날의 에피소드를 토대로 썼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85 (대곡리 99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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