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봄봄 봄봄』




파도




갈 수 있는 곳이 여기부터인가

올 수 있는 곳이 여기까지인가


밤잠을 설치던 기억 하나가

왔다가 부서져 사라지고

다시 왔다가 밤새 온 길

곤두박질치며 되돌아간다


넘어서지 못하는 백사장 앞에서

줄줄이 달고 온 사연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기에

오고 다시 또 와서 온몸 던지고는

할 말 다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나




파도는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길밖에 모른다 되돌아가는 길을 잃는 채 더 나아갈 수 없을 때에는 곤두박질친다 때로는 그 곤두박질로 갯바위가 일어서고 갈매기가 잠을 깬다 바다는 파도를 친구 삼지 않았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출렁이다가 잠잠하다가 폭풍처럼 일어나다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 변화무쌍하고 재미난 친구이다

정동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풍랑이 이는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한다 파도 소리가 이렇게 막고 정갈하면서 서늘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없을 때에 파도 소리는 무섭도록 크게 귓가에 와닿는다

백사장에 닿기까지 무섭도록 질주하면서 포말을 품어대지만 백사장에 닿으면 어이없게도 힘없이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면서 파도는 참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한 성질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일없이 밀려오고 일없이 밀려가는 모습을 자꾸 보면 바다는 제 마음을 드러내려는 것도 같다 뜨거운 한낮의 파도 소리는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목이 쉬지 않은 바리톤의 음성처럼 묵직하지만 한겨울 추운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테너의 깔끔하면서도 맑은 고음 같다

그래서인지 여름밤바다 파도 소리보다는 겨울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훨씬 매력적이다 고요한 1월의 밤바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 바닷가에서는 잠들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다의 고독한 몸부림이 클수록 파도 소리가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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