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봄봄봄』
때
잎들은 모두 떨어지기 전에
햇살과 땅과 바람과 눈을 맞춘다
눈을 먼저 맞춘 다음
잎들이 하나둘 신고식을 하면서 떨어지고
뒤늦게라도 땅과 바람과 햇살과 눈 맞추지 못한 잎은
나무 위에서 그저 땅을 바라보며
햇살과 땅과 바람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떨어져야 할 때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바람에 실려 날아가듯 떨어져야 덜 아픈지 살펴 움직인다 아무리 아껴두고 싶은 어여쁜 단풍도 잎잎이 보석보다 고와도 결국 나무와 헤어진다 어쩌면 이별하기 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이 부는 날 때를 맞춰 흩어지는 것은 별빛도 마찬가지다 낙엽처럼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곤 한다 단풍은 나무에게 온몸으로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주 잊어버리지 말라는 눈빛이다 오래 한자리에 있고 싶은 갈망이다 어쩌면 너무 울어 피멍이 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땅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은 한 잎 낙엽이 된다 타오르던 한창인 때의 기억들을 안고 빈 몸으로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바람에 흔들리며 아래로 아래로 날아드는 생이 된다 쓸쓸하지만 슬프지만 않은 허전하지만 괴롭지는 않은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은 것은 떠날 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낙업이 된들 한 때 나무였던 수많은 기억들을 잊을 수 없고 수많은 잎으로 달았던 기쁨과 슬픔을 잊을 수 없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일상조차 멀리 미뤄 온몸으로 땅이 되는 그 잎들의 때를 침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움직이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면 소리 내여 바스락거리고 한껏 붉다가 한껏 아름답다가 숲을 이루는 한가닥 거름이 되는 일을 위해 홀연히 사라지는 잎들의 뒷모습이, 여윈 생에서 낮고 낮은 길을 여는 맑은 마음씀씀이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