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어느 봄날의 일기』
바람개비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도는 바람개비
바람이 없는 날은 한 걸음 앞선 채로
바람보다 더 먼저 달려가 바람을 데려온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닿지 않는 그리움
가닿지 못하는 마음을 등에 업고
바람보다 먼저 그 자리를 찾아 나선다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곳에서는
미처 돌아오지 못한 그리움도
천천히 돌면서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내륙의 어느 호숫가에서 바람개비를 만났다 사방팔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호수의 주차장에 느닷없이 꽂혀 있는 각양각색의 돌아가지 않는 바람개비를 보면서 조금은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왜 바람개비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개비를 그곳에 심어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는 듯한 먼지가 가득한 바람개비 얼굴을 보면서 <때를 잘못 만나 제 구실을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풍력발전을 일으키는 거대한 풍력기들도 높은 산 위에 거대한 몸체를 세워 천천히라도 돌아간다 그런데 작은 바람도 잘 일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곳에 서 있는 무수히 많은 바람개비를 보면서 나도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한다
좀처럼 돌지 않는 바람개비들은 어디가 고장 난 것이 아니다 다만 장소를 잘 못 택했다 그리움도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되돌아오려면 약간의 바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바람의 힘으로 흔들리면서 세월 속에 묻혀 있는 머지 자욱이 쌓인 마음들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 아주 천천히라도 한번 돌기만 한다면 바람개비는 스스로 도는 힘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우물을 자아올릴 때 마중물이 필요하듯이 바람개비가 돌 때에도 마중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없다면 스스로 바람이 되어 앞으로 힘껏 달려 나가 스스로 작은 바람 바람을 마중하는 마중바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움이 너무 오래 묵어 도무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그리움을 움켜잡고 그리움의 방향으로 힘껏 달려가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마음에 마중바람이 닿아 그리움의 불씨가 다시 살아난다
무엇이든 제구실을 해야 한다 제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세상의 가장 작은 바람 한 자락이라도 닿아 그곳의 바람개비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