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어느 봄날의 일기』
우산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쓴다
아무리 큰 우산을 펴도
파고드는 빗방울에
살금살금 어느새 몸이 젖는다
젖는 줄 알면서도 우산을 펴는 것은
아픔에 젖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 팽팽한 손길로 파고드는 서늘한 외로움
가려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우산을 편다 우산을 편다고 해서 젖지 않는 곳은 없다 아무리 큰 우산도 아무리 잘 만든 우산도 오래 쓰고 걷다 보면 어느새 내리는 빗방울로 서서히 머리끝까지 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꼭 우산을 챙겨 쓴다 아무래도 우산을 쓰는 것이 덜 잡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거나 양보하는 것은 꽤 커다란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 없이 적당한 비가 내리는 우산 속에 걷는 연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들이 쓰는 우산은 사랑이라는 우산이기 때문이고 조용히 내리는 비는 견딜만한 외부의 압력이기 때문이다 우산으로 가릴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셋이라면 더욱 그 자리는 줄어든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먼 거리를 갈수록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줄어든다 받아들이고 비 맞은 다음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남는 것과 버릴 것 잃은 것 새롭게 생겨나는 것들이 나뉜다
그렇다고 아예 우산 하나 없이 긴 삶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불안하고 눅눅한 삶이 연속될지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우산을 준비한다 물질적인 우산에서 정신적인 우산 다양한 내용물을 지닌 우산을 받으며 순간순간 외부의 환경을 잠시잠깐 벗어난다
하지만 오래 걸으면 오래 살다 보면 어느새 이런 잡다한 정신적 물질적 압력들을 받아낼 우산의 힘은 무력화된다
세상에 어떤 우산이 세월을 이길까 그런 우산은 없다 결국 좀 더 일찍 혹은 뒤늦게 혹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눅눅한 비를 맞고 젖은 채로 사느냐 말려가며 사느냐 다 말리고 또 다른 비를 맞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태풍 속에 밖으로 나가는 무모함이나 나가야 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뒤집어진 우산을 팽개치고 뛰어가는 사람이 때로는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조금은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의 태풍은 맞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튼튼한 방패 같은 우산이 있다면 조금의 비 맞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을 터이고 우산이 망가져서 팽개친다면 온몸으로 태풍과 부딪쳐서 죽거나 살아남게 된다
살면서 어떤 비가 내릴지 얼마큼 내릴지 어디쯤에서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우산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래야만 마음이 좀 더 편하고 삶이 덜 눅눅할 테니까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결코 어떤 우산도 소용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온몸으로 그 비를 다 맞게 된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반드시 뽀송뽀송한 몸으로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