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인 시첩

봄비

by 김지숙 작가의 집

봄비



봄에 내리는 비는 부드러워

꽃잎에 새싹에 새순에

살그머니 닿아야 하니까

겨울에 등 떠밀려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다가와

메마른 땅속으로 밀려드는 중

빈 가지마다 속절없이 찾아들어

아슴한 꿈을 깨우고 조용히

연초록 세상 향해 손잡고 걷는

가늘게 흩어지는 우정



봄이다 언 땅에서 숲언저리에 들어서니 땅두릅 꽃사과 찔레의 새순들이 마구 올라와 있다 언제 그렇게 순을 내고 물이 올라 살아있는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가 흙도 이젠 폭신폭신한 채로 발바닥에 들러붙는다

봄비가 한번 내리고 나면 나무들이 키자람을 한다 다 맑은 얼굴로 온몸을 봄비에 궁그리고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켠다 그래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봄이니까 쑥쑥 자라야 하는 때이니까 한때 봄이었던 삶 속에서 여전히 봄을 맞는 삶을 살아간다 나이가 들면서 맞는 봄은 어떤까 오래 묵은 나무들도 봄이 오면 새잎을 달고 여름을 준비한다 뿌리들이 봄비에 잠을 깨고 닫힌 꿈길을 열어 진초록 숲길을 새로 연다

봄비는 언제나 생과 삶과 희망을 끌어당긴다 조금씩 조금씩 당겨 말라비틀어진 나무며 땅의 몸을 펴고 있다 자작나무 숲에 연초록빛을 더하고 소나무 숲에는 초록빛을 더하고 낮은 숲길에는 진달래 철쭉의 가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고 싶게 한다

봄비는 굳어버린 몸을 녹이고 타들어가는 마음에 온기를 불러들인, 희망의 버튼을 켜는 단단한 믿음이 있는, 흔하지 않은, 심장을 요통 치게 하는, 소리 없는 우정이다 봄비가 내리기 전에는 몰랐던 이목구비 또렷한 잘생긴 우정이다

겨울에는 눈을 맞으러 나가곤 했다 이제는 봄비는 앉아서 창밖으로 바라보며 맞곤 싶진 않다 반가운 친구인양 번쩍 일어나 겨울을 보낸 비쩍 마른나무처럼 봄비를 만나러 갈 채비를 한다 제비꽃처럼 흔들리다가 마른 가지의 새순처럼 자라다가 팽창하는 꽃봉오리의 열정을 닮고도 싶고 고단했던 뿌리의 삶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단단한 흙덩이의 흔들리는 몸을 움켜쥐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용맹을 닮고 싶어서 온몸으로 봄이고 싶어서 봄비를 맞으러 밖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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