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속에 쉴 수 있는 집을 가져봐
내가 피운 꽃을 내가 본다
몸안에 들어와 있는 시간만큼은
내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
참으로 쉴 곳은 그곳밖에
내몸을 내가 느끼는 순간
나는 내 몸의 주인
내가 피운 꽃을 내가 본다.
마음이 너를 끌어당긴다
마음따라 흐르는 피
피따라 흐르는 기
기운 따라 피는 꽃
눈에 보이네/마음이 보이네
내가 피운 꽃으로 환해진
몸속의 집
-탁영완, 「내가 피운 꽃 」
자고 나면 키가 크고 몸피가 불어나던 누에가
마침내 섶에 올라 햇솜처럼 하얀 고치를 짓던 일이
볼수록 신비하고 경이로웠던 의문과 함께
고작 열세마디 애벌레의 삶보다 못한
사람의 생애가 새삼 초라해 보였다
더 늘어날 리 없는 서른 세마디 등뼈를 굽히고 펴면서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짓고 누구를 위해 몸 바쳤으냐
한 벌 비단옷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누에가 승천의 날개 파닥인 줄 알고는 있느냐
누구든 생존의 본능으로 실을 뽑고 집을 짓지만
단 한번 필생의 집을 짓고 생을 마감하는 누에의 부드럽고 눈물겨운 희생을 보아라/지나간 날을 아쉬워하고 후회하기 전에
남은 날은 더 순결하고 질긴 생명의 실을 뽑아
사랑의 열정의 고치를 지어야 하리라
오늘 세상이 끝난다 해도
-한경동, 「누에」
집이야 엉덩이 붙일 정도면 됐다 싶더니
쉰두평 아파트를 산 친구네
집들이를 가선 거실에 축구장을 앉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갓 등단한 후배작가가
명산게곡에 지은 통나무집 서재는
초원의집이라고 명명해주고도 싶어진다
집을 세 채씩이나 소유하고 또 집을 사러나간
어느 복부인의 수완에 입이 쩍 벌어지더니
이제 아파트를 짓고도 정작 자기는
아파트 한 채 없는 선배가 지긋지긋하게 여겨진다.
남자기 태어나면 집 한 채는 성주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의 집을 떠나온 후
나이 오십 되도록 전셋집이나 전전하면서
그러고도 끊임없아 남의 집이나 힐끔대는 심사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애인에게 끝내 가닿지 못하고
봉두난발을 쥐어뜯는 어느 청춘처럼
내가 마침내 정주하고픈 집이 어디엔가
존재하기는 존재하는 것이어서 이렇게
봉두난발을 쥐어뜯는 것일까 자꾸만 되물어진다
아니 불우와 비애처럼 홀로 버려져
온갖 미물짐승만 들락거리는 폐가와 같은 마음의 집조차 간수하지 못하는 처지라서
길을 곧 집 삼아서 이따금 먼 데 가버리는
마음이여, 길 자편 언덕에 새로 생긴 집을 보며
되레 집 반대쪽, 시간 속에다 거처를 정해버리곤 하는
마음이라면 남녘 끝 어느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들, 삶이여!
-고재종, 「집」
탁영완의 시「내가 피운 꽃」에서 화자가 말하는 ‘집’은 눈앞에 실재하기보다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화자는 자신의 몸속에 꽃을 피우고, 그 꽃들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을 지닌다. 화자의 내면의 ‘집’에서 화자는 자신을 자기가 스스로 피운 꽃을 바라보며 생동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가 피운 꽃으로 집을 환하게 변하게도 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비록 자신의 집을 내면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두긴 하지만 화자의 ‘집’은 화자를 따뜻하게 해주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한경동의 시 「누에」『빛나는 상형문자』에서 화자는 누에가 평생 단 한 칸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희생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화자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불철주야 희생하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일부계층의 사람들은 명리와 사욕을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누에가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 속에서 얻은 ‘집’이란 오랜 삶의 노력 끝에 얻은 것이라야 더욱 귀하다고 여긴다.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집’이란 화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집으로 생명이 살아있는 한,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사랑의 열정으로 지어 가는 공간을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재종의 시 「집」『작가와 사회』(2005.8.30)에서 화자는 ‘집’이 생활과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공간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집’은 사람에 따라서는 단순한 생존 공간을 넘어서는 사치스러운 공간, 명리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또한 남을 위해 아파트를 짓지만 정작 자기 집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서글픈 현실적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화자 자신은 자신을 담은 집조차 폐가마냥 힘겹게 붙들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며, 어디에도 못 안주하고 방랑하는 심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