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안·장정임·최장길·김용임
김창안·장정임·최장길·김용임
대부분의 문화는 개별성과 일반성의 통일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래서 역사적 유산을 밑거름으로 획득된 문화는 매우 다양하며 때로는 독창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독창적인 문화라 하더라도 문화유산이 현대에 끼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당대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하느냐 혹은 회상적 고취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문화의 수용가치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순히 과거의 문화를 유산으로만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회상한다면 문화유산의 가치와 생명성은 상실되고 만다
우리는 당대 현실 속에서 과거의 문화유산을 상호 공유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같은 종류의 문화일지라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이는 개인 각자가 자신의 고유성을 토대로 문화유산과 상호 소통하거나 혹은 개인이 원하는 다양한 형태로 유대감을 맺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문화유산과의 교감 형성은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전혀 교감을 형성하지 못하는 인간관계와 비교해 보면 전자가 훨씬 더 많은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눈과 몸을 동원해 문화유산과의 독자적 교감을 구한다. 특히 시인은 개인적 환영(幻影, illusion)을 언어로 표현한다.
‘가야’를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룬 가운데서도 과거 금관가야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은 신화를 자신의 독창성을 가미시켜 독자에게 개인적 환영을 만들고 보여주는 경우이다. 이들 시의 주된 소재는 탄강신화 속에 나오는 영신군가 「구지가」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일 아니 내놓으면
구워서 먹으리
신나게 빙글빙글
노래하며 춤추자
하늘엣 내려온
자주 빛 한줄기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상자엔 해처럼
둥근 여성 개의 황금알 있었네
그 알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사내아기
-이창안 「여섯 개의 황금알」 일부
그는 북방계 희고 훤칠한 무사
여섯 개의 알로 구지봉에 내려와
철기시대를 말달렸다.
왕릉은 옛 궁궐터 가까이
백성들 숨소리까지 닿는 곳
발아래 휘도는 낙동강을 두고
신어산 분산성 병풍으로 두고
-장정임 「가야이야기 1」 일부
금관국 철기문화 갑옷을 입고
천년을 쉬지 않고 기어 나온 거북아
삼국지 철의 왕국 신들린 혼령
지금도 여섯 알 태몽을 싣고
찬란한 가야노래 불러보자
가야의 생명넋에 흥이 나는구나
-최장길 「구지봉」 일부
거북아 거북아 움츠린 목을 빼어
요동치는 세상을 한 입 베어 물어라
진창에 빠져도 잔도의 길가더라도
너울너울 춤추는 평등세상 내어라
-김용권 「新 구지가를 부르다」 일부
위의 시들은 한결같이 「구지가」의 ‘거북’이 시의 주요 소재가 되어 있다. 특히 이창안 장정임의 시에서는 「구지가」의 원형을 들여와 화자가 봤음직한 형태로 김수로왕의 건국 신화의 환영을 독자에게도 보여준다.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시작된 왕의 탄강을 지켜보는 화자는 자신의 개인적 환영을 거름망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한다. 이러한 시들은 신화적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능을 맡고 있기에 개성적이기는 쉽지 않다.
최장길의 시에서 화자는 ‘거북’을 부르지만 탄강할 당시의 시공간은 분명 아니다. 이미 천년의 세월도 훌쩍 지난 오늘의 가야를 그려 놓았다. 이는 과거의 가야문화를 오늘에까지 이르려는 화자의 의지로 보인다. 가야의 문화는 지나간 유산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속선상에 놓여있다는 환영을 보이는 과정에서 가야의 문화유산에 대한 친밀감은 더욱 크게 형성된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가야 문화의 환영을 독자에게 개방하여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자신이 느낀 가야 문화를 독자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공유하려는 바람이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주체적이고도 바람직한 유대감 형성을 위한 표현의 형태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 자산으로 남겨두지 않고 상호 호혜적 실천력이 넘쳐나는 행위로 보인다.
김용권의 시에서 화자 역시 ‘거북’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화자는 탄강의 뿌리가 되는 ‘거북’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이 이룰 수 없는 평등세상, 요동치는 세상을 ‘거북’이 평정해 주길 바라는 이상적 실현자로 거북을 든다. 이는 오늘날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의 질서를 ‘거북’에게 맡겨 평정하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나아가 화자는 ‘거북’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믿는다. 전능자의 자리에 위치한 화자가 생각하는 잘못된 현실을 씻어내려 한다. 이러한 화자는 ‘거북’을 통해 세상을 재평정하려는 소극적 삶의 자세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