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바뀌었어요
4. 토포스와 아토포스를 마치며
롤랑 바르트는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을 말한다.(『사랑의 단상』동문선 2004)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언어 체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아토포스‘를 찾아 헤맨다.
문학의 경우도 기존의 공간 가운데서 새로운 장소성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아토포스‘를 위해 스스로 작가들은 부단히 이에 빠져들만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미처 인지되지 못한 통념의 공간이 장소성을 띠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재공간화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민요가 각 지역마다 새로운 향토성을 덧입고 새로운 노래로 재구현되는 점으로 본다면 ‘아토포스’는 시적 화자가 경험과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장소를 의식화하여 작품을 구현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러한 ’아토포스‘는 화자의 의식과 이를 형상화하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공통적으로 ’토포스‘의 통념을 주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면 깊이 자기의식을 지향하는 바, 획일적인 장소에 대해 새롭게 환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현장성에 강한 물리적 공간에 대한 시인의 시적 의식이 고유한 자신만의 ’아토포스‘로 다양하게 재의미화된다.
‘토포스’는 타자와 관계를 만들어 가는 통념의 장소이라면 ‘아토포스’는 개인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소를 자기화한 의미있는 의식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내면의 정서가 만나서 결합한다는 점이 필수적이고 이러한 정서에는 인간과 사물이 놓인다. 장소에 대한 반응을 시인은 시로 표현한다.
따라서 ‘토포스’와 ‘아토포스’는 대부분의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이들 자신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어쩌면 창작의 근원지가 될 수도 있고 떠 어쩌면 내면의 세계와 시대적 사회상황을 짚어내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극복해 내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1월호의 작품에 나타나는 다양한 공간들을 ‘토포스’와 ‘아토포스’라는 두 개념으로 바라본 바는 다음과 같다.
우선, 김규화의 시 「공」에서 화자의 눈에 비친 공은 물론 그 밖의 물체 역시 ‘가로수’도 둥그스럼하게 휘고 ‘쇠가죽’도 의미하는 둥근 세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둥글다는 의미에 몰입된 화자 자신의 내부를 보여준다. 김욱진의 시「무료급식소」에서 수정못은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는 이미 화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화자 자신을 바라보고 삶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는 곧 기존의 사용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성을 뜻하는 ‘아토포스’로 바뀐다.
양준호의 시 「다시, 십자로에서」 ‘십자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된 ‘구성과 파괴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길목이 되는데 이는 이전의 것을 포기하는 양가적 감정을 담고 매어두는 장소로 재배치된다.
정두현의 시 「화전민」에서 ‘오두막’은 화자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준 장소는 이전에 이미 무수히 스치고 지나던 무의미한 ‘공간’과는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화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만드는 점에 ‘아토포스’로 의미변화를 갖게 된다.
김정기의 시 「카이로스의 침대」에서 ‘하늘’은 통념상 침대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화자가 폈다가 접었다 할 수 있는 침대가 되면서 기존의 장소가 지니는 의미가 소멸되고 새로운 장소성으로 바뀌면서 ‘아토포스’로 변화된다.
이희국의 시 「다리」에서 화자의 주체적 경험들이 내재되어 있던 ‘다리 위’라는 경험의 장소가 나타난다. 현재의 장소인 ‘영종대교 위’에 과거의 선생님의 목마를 타던 ‘다리’위를 불러 들여 재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면서 가치관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인식의 체계를 구현한다.
김철교의 시「접시꽃」에서 ‘접시꽃’은 풍요 야망 등의 의미를 지닌다. 접시꽃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야 한층 더 넓은 먼 나라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접시꽃’은 개인적 서정이 담긴 ‘아토포스’를 본다.
정유준의 시 「겨울 마곡」에서 ‘마곡’은 화자가 특별히 의미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 의미를 각인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의 감정 교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통념적인 사찰의 마곡은 사라지고 자신이 느끼고 가까이 하는 마곡에 대한 감정의 깊은 의미를 지닌 ‘아토포스’를 전달받는다.
끝으로 시에서 ‘토포스’는 통념 속에서 만들어지고 보이고 쉽게 느끼지만 ‘아토포스’는 추상성을 띠므로 예측할 수도 없고 단정 짓거나 예단하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은 끝없이 다양한 장소와 마주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덧입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정서적 상황으로 구현하는 ‘아토포스’를 선택한다.
따라서 수많은 ‘토포스’와 더 많은 체험과 개성을 지닌 ‘아토포스’를 재현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몫이다 이는 장소와 시인의 존재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알 수 있는 근원이 되며 동시에 힘이 발현되는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알아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적 사회상도 읽어 낼 수 있다. 동시에 ‘아토포스’, 즉 새로운 관념으로 덧칠된 장소가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삶의 존재 방식을 알아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회복하는 기준이 되므로 시에서 ‘아토포스’를 찾는 방법은 아주 요긴한 문학적 해법이다. 왜냐하면 ‘아토포스’는 인간의 내면을 아주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