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교단에 선 지 채 2년이 되기 전에 자신이 쓸고 닦았을 교실에서 한 교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 했던가. 젊은 나이의 죽음은 더 많은 고통과 상실감을 남긴다. 교직 선배로서 무엇을 했나 하는 반성은 더 뼈아프다.
죽음을 결심한 채 그날의 일지를 쓰고, 업무를 마무리했을 마음이 어땠을까. 고통이나 슬픔은 이유가 납득이 되거나 타인과 공유될 때 희석되기도 한다. 연로한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오랜 갈등 끝에 연인과 결별했을 때처럼. 그러나 어떤 고통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괴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아닌 데다가 내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나, 논리나 과정 없이 무턱대고 들이대는 권력으로 인한 부조리들 앞에서.
잘못한 것도 없이 매일 새로운 멍을 마음에 새겼을 선생님은 홀로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수시로 뻗어오는 간섭과 위협은 얼마나 무섭고 버거웠을까. 선생님을 믿고 존중하기는커녕, 어리다고,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하는 교만한 눈길은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잡을 지푸라기 한 올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 얼마나 낙담했을까.
나의 그 시절. 스물셋 나이로 처음 상계동의 여자중학교에 부임했다. 개발되기 전이었던 산동네는 가난하기 그지없었고 나는 덜떨어진 교사였지만, 이유 없이 선생님을 따르고 좋아해 주었던 그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 생선 좌판 앞에 앉았다가 손녀의 선생님이라는 말에 전대에서 꼬깃한 천 원짜리를 두어 장 꺼내 기어코 내 손에 쥐어주시려던 아이 할머니의 마음은 ‘살림’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 어떤 친구의 편지와 함께 오래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날의 나와 세상을 떠난 그 젊은 선생님을 겹쳐본다.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이 된 첫 해, 고사리 같은 첫 제자들과 알록달록한 그림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다시금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아이들을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고 했다던가. 작년의 그 아이들은 행복했었다고, 고맙다고 선생님을 추모하는 화환을 학교 앞에 놓아두었다. 이것이 현실일 수 있는가. 아홉 살 아이들이 스물 다섯 선생님을 추모하다니. 총알 난무하는 전장도 아닌데. 다시금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얼뜨기 교사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여학생들 앞에서 권위를 갖기 위해 웃음보다는 경직된 표정을 지었고, 대화가 아닌 훈화를 늘어놓곤 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교사가 무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깨달은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다. 말썽꾸러기를 혼내다 혼내다 지쳐빠져서 그냥 끌어안고 만 그 순간, 나는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발령받고도 몇 년이나 지나서.
요행히 내게는 허용되었으나 그 선생님은 갖지 못한 몇 해.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드디어 흔들리지 않는 교사로 우뚝 설 수 있는 그 시간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그 선생님은 세상과 절연했다. 첫 해부터 아이들과 공감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던 그분이 나처럼 그 몇 해를 지났으면 어떤 선생님이 되어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했을까. 속 좁은 나와는 시작부터 달랐던 분이었으니 얼마나 품이 넓고 지혜로운 선생님이 되셨을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의 사랑으로 불안을 이겨내고 자신을 사랑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이름도 모르는 그 선생님께 먼저 교사의 길을 걸었던 자로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교사가 천직(天職)에서 천직(賤職)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힘을 앞세운 이들이 교사의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고 한다. 정당한 교육 행위를 아동 학대로 몰아세운다고 한다. 교사는 그저 학교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관리인으로 기능하기 바라는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선생님들조차 세태에 따른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마음은 주지 않고 가르친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과연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이 원하는 게 이런 것인가.
또 누군가는 학생 인권을 강조하다 보니 교권이 실추되었다고 강변한다. 교권을 되살리려면 학생 인권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세상은 거꾸로도 가는구나. 교사와 학생의 권리가 상충된다는 이 기괴한 궤변을 잘도 늘어놓는 일부 식자층이나 권력자를 보노라니 다시금 분노와 서글픔이 몰아닥친다. 그런 식이라면 자녀의 행복은 부모의 행복과, 국민의 만족은 권력자의 만족과 상충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일부의 무지와 편견으로 세상은 조화를 이루는 대신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있다.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정의와 해석이 있다. 나는 교육은 이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자율이 타율에 선행하고, 개인과 전체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믿는다.
아이들과 만나던 교실에서 세상을 등진 선생님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교육 헌법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선생님도, 학생도, 학부모도 다 같이 행복할 수는 없을 거라는 타산적 전제를 떨쳐낸 자리에서 희망은 새로 싹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