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종점이었으면,
미지근한 바람이 다리에서부터 올라온다. 겨울처럼 차갑진 않지만 움츠려 드는걸 봐서는 아직 완전한 봄날씨가 아니다. 하차문 바로 뒷좌석의 바람을 막아줄 어떤 가림막은 없다. 그래도 춥지않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해본다. 차창밖 행인들의 옷차림도 얇아졌다.
'이 날씨에 반바지는 아닌데. 에휴, 관광객이네.'
반바지에 긴소매 맨투맨 셔츠 차림의 젊은 남자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가는 모습에 짐작해본다.
'관광객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렇게 다니는 애들이 요즘 많다고 하던데.'
여기까지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난다.
나도 이제는 선입견에 뇌가 굳어버릴 나이가 된건가, 늙었구나.
하차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한다.
천천히 살펴보는 버스안의 풍경이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몸이 나른해지며 눈꺼풀이 따끔거린다.
아직 10분이상 더 가야한다.
이렇때는 목적지가 종점이었으면 한다.
종점이면 그냥 모른척 하고 눈 감아 버릴텐데.
11시 50분에 채취한 농양과 혈액 샘플이 검사실 송신구를 타고 날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밤의 침묵을 깨고 있다. 6개월차 신입은 항생제 피부반응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다른 신입과 달리 센스가 있다. 나의 혼잣말을 듣고 항생제 처방이 날것을 예측하였다. 컴퓨터 앞을 지키고 있다가 항생제 종류가 정해지자 바로 피부반응테스트를 준비한다. 그녀와 같이하는 근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센스있는 신입이면 많은 지시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적응이 덜된 신입과의 근무는 신경이 쓰이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어떻게 들어 올지 모르는 질문과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사건들이 기다리는 근무는 시작도 전에 피곤하다.
"선생님. 수액도 하나 준비해야 해요. 오프로디에스 1리터 싱글이요."
"녜에. 선생님."
수액 라벨을 건네는 나에게 살짝 웃어보인다.
그녀는 예쁜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다. 약간 통통한 몸매에 둥근 얼굴이 앳되 보이는 20대 청년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여유가 있다. 웃지 않지만 웃고 있는 느낌이 드는 인상을 가진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선배들이 하는 대화에 반응이 빠르다. 선배들의 대화를 귀 담아 듣고 있다가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 고장 출신은 아니지만 이 고장의 간호대학을 졸업했다. 또래보다 한 두살 나이가 많은걸로 알려져 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취업을 해서도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다. 소문에는 다음달에 원룸을 얻어 나갈거라고 했다.
"선생님. 달아 놓은 꼬마병은 빼고 오디에스 연결해주세요."
나는 카트를 밀고가는 그녀의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녜에."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보통 열이 나거나 이벤트가 생긴 환자들의 혈액검사가 나면 수액 처방을 예측하여 혈액샘플을 하면서 수액을 위해 혈관카테터에 100ml짜리 생리식염수를 연결시켜 둔다. 그러면 환자를 두번찌르지 않고 혈관확보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시킨 100ml 짜리 생리식염수를 우린 꼬마병이라 부른다.
그런데, 며칠전 신입 하나가 그 꼬마병을 제거하지 않고 1리터짜리 수액과 같이 연결시켜 놓아 살짝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처방없이 혈관확보를 위한 잠시의 융통성이 지적질하기 좋아하는 일반외과의사에게 걸린것이다. 수액 100ml는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가 심장이나 신장이 않좋은 노인의 경우는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보통 외과의들은 수액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수액에 예빈한 것은 일반적으로 내과의사, 특히 심장내과나 신장내과 의사들이다. 그런데 일반외과인 그는 그날 따라 유독 예민하게 수액에 대해 지적질을 했다. 특히나 처방없이 주었다는 것도 문제시 시켰다. 100ml를 다 주입한 것도 아니라고 들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성질하고는," 이라 말했고 전하는 후배가 "그래도 수술실에서 칼은 안 던진답니다."라며 웃었다.
후배의 농담에 나도 "병동에서만 그래."하고 웃어 넘겼다.
지금 처방 주사를 맞아야 하는 응오 호안이 그 예민한 일반외과의사의 환자다.
야간 당직의인 호흡기내과의사는 수액과 3세대 항생제 처방을 냈다.
컴퓨터에 찍힌 처방시간으로 00:03이 찍혔다.
자정을 기점으로 처방날짜 계산이 달라지기에 난 최대한 천천히 항생제 처방이 나길 바랐는데, 다행이다.
00시30분으로 항생제 시작 시간을 잡았다. 처방은 8시간마다 이니, 오전 08시30분에 한번 더 주라고 인계하면 내 근무는 끝난다.
다음은 아침번이 주치의에게 보고하고 주치의 처방을 받으면 된다.
밤사이 응오 호안의 열이 내리기를 바라고 더이상 통증이 없기를 기대하면 된다.
"선생님. 한시간 뒤에 바이탈 한번 더 해볼까요?"
항생제 피부반응 검사 결과 음성을 확인 후 항생제를 혈관카테터에 수액과 함께 연결하고 온 신입의 질문이다. 알아서 해주겠다니 고맙다.
"녜, 정각에 해주세요."
11시 20분경에 응오 호안의 고열을 측정했으니 1시 정각에 측정하면 되리라는 판단으로 나는 신입에게 이야기 했다.
항생제 처방전에 해열진통제를 투약했으니 그 사이 응오 호안의 복통이 사라져 주길 바란다.
"선생님. 비피는 120대인데, 열은 38도예요."
01시 5분전에 바이탈을 하러간 신입이 01시가 조금 지나서 스테이션으로 돌아와서 한 말이다.
"페인은 좀 어때요?"
"아프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인상 쓰지 않아요?"
"그냥 자는 것 같았는데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응오 호안의 침상으로 갔다. 이렇게 애매할 때는 직접 확인하는 것이 실수를 줄인다.
"응오 호안님, 배 아픈것은 어때요?"
감은 눈을 반쯤 뜨고 쳐다보는 그의 흰자위에 붉은 실핏줄이 잔뜩 깔렸다.
"배 아파요?"
고개를 움직이는 그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순간, 배만 아픈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아파요?"
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머리 말고 다른 곳도 아파요?" 들고간 혈압계의 커프를 팔에 감으며 내가 물었다.
"여기, 여기" 인상쓰며 손가락으로 배꼽 주위를 가르킨다.
"잠깐만 말하지 말아요. 혈압 다시 잽니다."
전자혈압계의 숫자들이 계속 올라가더니 내려가기 시작한다. 물끄러미 숫자판을 바라보다 그의 숨쉬는 가슴의 오르내림을 관찰한다. 깊게 들이마시지 못하고 호흡도 약간 빠르게 느껴진다. 속으로 '불안한데...'라고 생각한다.
전자혈압계의 숫자가 멈추었다. 128과 104라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약간 작은 크기의 118이라는 숫자가 전자혈압계 한쪽에 나타났다.
'응?' 전자혈압계의 숫자를 다시 확인 하고 빠르게 오르내리는 배를 쳐다보았다.
약간 빠르게 움직여 스테이션에 도착한 후 수화기를 들었다.
"병동입니다. 아까 확인한 응오 호안님 비피가 128에 104이고, 펄스 118에 38도입니다. 배와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약간 빠른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신입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처방한 진통소염제는 들어갔나?"
"예. 11시 50분쯤에 들어갔고요. 안티도 네가티브나와서 카바했습니다."
"음. 올라갈께요."
수화기를 내려 놓는 나에게 신입이 질문한다.
"120에 100인데, 안 괜찮은가요?"
"선생님 반올림하면 130에 100인데요. 이완압이 100이면 높은거예요. 수축압도 중요하지만 이완압이 높아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38도 이상이면서 이완압이 높고 호흡이 빠르면 보고해야 하는거예요. 일단 발열이 크라이시스를 일으킬 정도가 될 수도 있는거예요. 단순히 혈압만 보지말고 전체적으로 봐야 해요."
말을 마치는 내 눈에 응오 호안 옆침상의 환자 보호자가 병실을 나오는게 보인다.
"선생님. 옆에 외국인 이상한 소리내요." 보호자는 약간 다급한 목소리다.
응오 호안의 침상으로 향하면서 뒤따라 오는 신입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라이트." 신입에게 빠르게 말하며 응오 호안의 병실로 들어갔다.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 약간의 식은땀도 보인다.
발소리가 들리며 호흡기내과 전문의인 당직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시간이 기다린다는 느낌이 머리속을 스쳤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