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도 없는 흑백사진 속 그녀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기억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우리 가족은 부산 아미동이라는 산동네 높은 곳에 살았다. 우리 집이 제일 위에 있었고, 집뒤는 바로 동산(아미산)이었다. 집은 대문도 없이 축대 위에 지어진, 현관문 앞은 조그만 길이 바로 마당이 되었고 그 마당은 낭떠러지로 연결되며, 낭떠러지 아래는 누군가 일궈놓은 그리 작지 않은 텃밭이었다. 그래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높은 곳에 사는 경우의 장점도 있다.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밤, 외삼촌과 평상에 앉아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는, 그날이 크리스마스라 유난히도 큰 십자가의 불빛과 도로 한가운데에서 반짝이던 크리스마스츄리의 불빛이 아직도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다. 하늘의 별이 유난히도 많은 겨울밤, 반짝이는 츄리의 불빛과 차가운 공기 그리고 학생이던 외삼촌의 두런두런한 목소리는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드문 드문 기억나는 아미동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1학년까지 연결된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1살 많던 언니가 있었단다. 내 기억으로는 선명하지 않은 언니에 대한 기억이지만 엄마는 언니라고 했다. 난 아마도 동무라고 기억하는 것 같다. 그 언니를 비롯하여 또래 동생들과 어울려 소꿉놀이, 숨바꼭질 등등을 하며 그 달동네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다. 호박잎과 호박꽃을 따서 반찬을 만들고 흙으로 밥을 지어서 역할놀이도 했고, 아이들을 모아서 학교놀이도 하였고, 술래잡기 등등, 그 시절에 그 나이 또래들이 할 수 있는 많은 놀이들을 하며 밖에서 하루를 보내다 배가 고프면 집으로 갔다. 어느 날 배가 많이 고팠는지 아니면 엄마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해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뉘엿뉘엿 해질 무렵 쌀을 씻어 밥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엄마가 밥을 다 할 줄 안다고 놀라면서 말하던 기억이 어스름하다. 그러나 밖에는 해가 지고 아궁이의 연탄불위에 밥솥에는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내가 잘 익었는지 살핀다고 숟가락으로 밥을 조금 떠먹고는 아주 만족하며 웃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내 왼쪽 무릎에는 희미하지만 무릎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꿰맨 상처가 남아있는데, 어린 시절 그 아미동의 아이들과 놀다가 생긴 상처이다. 어느 날 술래잡기인지 숨바꼭질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숨으려고 달려가다 어느 집 돌담을 스치고 지났는데 무릎을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으니 아무렇지 않게 그 놀이를 진행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너 다쳤니 하면서 내 무릎을 보았다. 무릎에는 일자로 찢어진 피부가 말려 들어있었고,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상태였으나 내부의 막이 하얗게 보였다. 그때야 비로소 울었다. 아프다기보다는 무서워서 울었던 것 같다. 엄마가 일하러 간 상태에서 옆집 아주머니와 함께 근처의 병원으로 갔고, 의사 선생님은 상처가 깊고 많이 찢어져서 흉터가 남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6 바늘을 꿰매고 집으로 왔고, 연락받고 퇴근한 엄마는 많이 아팠냐고 물었는데 난 아프지는 않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흉터가 남을 것이라고 한 말을 엄마에게 전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크지 않은 흉터가 나와 같이 자라서 지금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흉터가 반질반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젊은 시절 성형수술을 잠시 생각했으나 다리에 있는 상처라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지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원양어선의 선원으로 1년에 한 번씩 집에 왔고, 어머니는 미용사로 미장원에 근무했다. 난 동생과 동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밖에서 놀면서 보냈고, 그 동네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제법 있었던 듯하다. 그중 친하게 지내던 1살 많은 여자아이가 있었단다 -사실 나는 그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 여자아이가 입학할 때가 되었을 때 7살이던 나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아이였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간판의 글자를 읽는 나를 엄마는 천재인 줄 알았단다. 아무도 알려 주지도 않은 한글을 어떻게 깨쳤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이들을 모아서 학교놀이를 할 때면, 난 항상 선생님이 되어 바닥에 ㄱ ㄴ ㄷ 같은 한글 자모를 그려놓고 아이들에게 가리키며 따라 읽게 한 기억이 있다. 엄마는 그런 나를 7살인데도 입학을 시키기로 결정을 했고, 그 친하다는 여자아이와 함께 학교를 보냈다. 미장원에 다니던 엄마는 입학식에 올 수 없어 동네 할머니(아마도 그 언니의 할머니였던듯하다)가 나를 데리고 학교 입학식에 참석하였다. 그때 검은색에 흰색 둥근 카라의 교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 흰 거즈손수건을 옷핀으로 고정하여 달고 입학식에 참석했다-그때는 꼭 교복을 입게 했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손수건도 가슴에 달고 학교를 다녔다. 입학식에서 유일하게 찍은 독사진에는 단발머리에 이마를 훤히 드러낸 옆가르마의 오른쪽에 머리핀을 꽂고 있는 내가 입을 꼭 다물고 턱을 약간 치켜들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을 꼭 다물고 턱을 치켜들고 앞을 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래서 사진만으로도 고집 센 아이처럼 보이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친하게 지냈다는 언니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엄마의 사진첩에 집 뒤의 동산(아미산)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흑백사진 한 장과 엄마의 기억이 그 언니에 대한 전부이다. 그때의 거의 유일한 기억은 언니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입학식에 대한 기억이 있다. 1970년 당시에는 학교시설은 부족했지만 베이비붐 세대들로 인하여 학생은 많았다. 한 반의 학생 수가 60~ 80명 정도였고, 중점지도가 필요한 저학년인 경우에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난 그런 세대의 마지막쯤으로 그렇게 아미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되었다. 입학식날의 기억은 넓은 운동장과 그 운동장에 교복 입고 손수건을 가슴에 단 많은 아이들이 반 팻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앞으로 나란히를 하며 서로를 살펴보던 표정들, 건물 앞쪽에 마련된 교단에서 교장선생님과 여러 명의 선생님들이 인사를 하였고, 여자선생님의 인솔로 따라 들어간 건물 안의 교실은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학교의 수업은 어땠는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사건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아마도 그날은 나의 오전반 수업이 있었고, 많은 아이들이 오후반 수업을 위해 교실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숫자카드를 책상서랍에 두고 온 것을 기억하고 오후반 수업 후 학교로 찾으러 갔더니 모든 책상서랍은 비어있었다. 다음날 선생님에게 없어진 카드에 대해 말했더니 잊어버린 사람이 잘못한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내가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속상하고 서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감정들이 기억이 되어 나는 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의심하며 바라보았고, 며칠 동안 모든 숫자카드가 다 내 것인 것 같았다. 이 기억은 내 것을 잊어버렸다는 상실감과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른에 대한 실망이 뇌리에 박힌 것이리라.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한다. 50년 전의 기억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거나 정서적인 충격으로 내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와 친하게 지냈다는 엄마의 기억 속 언니는 내 기억 속에는 없다. 사진을 보면서 아리송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어깨동무를 하고 뒷동산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며 우리 둘은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희미하다 못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 박힌 나와 그 언니의 모습은 그 만남과 인연이 진실이라고 한다.
그 시절의 사건들이 현재의 기억에 존재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때는 매일 만나서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었던 것이 사진으로 남아 나에게도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만약 그 사진이 없었다면 그녀는 내 기억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 사진도 지금은 없다. 30여 년 전 우리 집이 홍수로 물에 잠긴 적이 있다. 그때 사진첩들이 물에 잠겨 따로 보관한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의 사진은 남은 것이 없다.
그녀와의 사진도 젊은 시절 엄마가 보면서 이야기해 주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내 기억 속의 사진과 함께 스쳐지나 간 인연이 되었다. 인연은 사진으로 남고, 그 사진으로 인한 기억은 나에게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으로 남는다. 그녀는 어쩌면 나를 기억할까? 아니면 나처럼 기억하지 못하고 사진을 보면서 겨우 느낌으로만 알까? 궁금하기는 하다.
표지사진 : 1959년 남부민동에서 바라본 남항이미지 -'공유마당'에서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