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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Nov 09. 2023

선생님이 엄마 계모냐고 했어.

10대까지의 인연들 ; 기억에 남는 선생님

학창 시절의 기억들은 대개 마지막시절인 고교시절의 기억들이 먼저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학창 시절'하면 여고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라는 주제에는 고교시절의 선생님이 아니다. 자세히 기억하면 '나니'라고 부르던 고교시절의 담임이나, 괴짜였던 불어선생님도 기억난다. 하지만 내가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선생님의 첫째는 중학시절의 영어선생님이었고, 두 번째가 국민학교 1학년때 전학 간 학교의 담임이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인 국민학교 담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녀는 내 기억에 딱 한 장면만 존재한다. 그것도 흑백사진처럼 아득하다. 그녀는 교실 앞에 마련된 선생님 책상에-그 당시에는 그렇게 선생님의 탁자가 교실에 존재했다- 앉아있고, 나는 그 앞에 서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너네 엄마 계모니?" 난 한동안 멍해 있었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아니요"라고 했던 것 같다.  며칠 동안 난 선생님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등 하교 길을 곰곰이 생각에 잠겨 내가 좋아하는 전파상 앞을 지날 때도 즐겨보던 텔레비전을 쳐다보지도 않고 땅만 보면서 생각하다 습관적으로 도착한 집에서도 엄마가 계모인가를 생각했다. 



당시 아미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 2~3개월 만인 여름에 영도로 이사를 했다. 가게에 딸린 가정집으로 이사를 했고, 엄마는 미장원을 차렸다. 아빠는 원양어선에서 내려 영도의 어느 선박 관련이거나 수출관련하는 회사에 다녔다. 난 영도국민학교 1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영도국민학교는 일제시대때부터 있던 학교로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교문 왼쪽에 새로운 시멘트 건물과 교문 맞은편의 옛날 목조 건물이 함께 존재하고, 시멘트 건물을 돌아가면 뒤쪽에 작은 운동장이 있고, 또 다른 건물이 존재하는 꽤 큰 학교였다. 대교동 집에서 학교까지는 계속 오르막길로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20~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였다. 

집이 있는 골목을 나와 왼쪽으로 꺾어 큰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 시장입구를 지나 해동의원을 지나고 건널목을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계속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 오르막을 계속 오르면 그 오르막의 끝에 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세 개 있었다. 학교앞길은 큰 도로여서 차가 간간히 다니기는 했어도 내 기억에는 차가 학교 앞까지 오는 경우는 정말 큰 행사를 할 때 외는 없었던 것 같다. 그 학교에서 입학식은 하지 않았지만 졸업식을 했고, 전학을 왔기에 6년 개근상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학교는 빠지면 안 된다는 내 부모님의 교육방식에 의해 나는 꼭 학교를 갔고, 심지어 4학년 때 배탈로 설사하여 조퇴하고 온 나를 엄마는 옷을 갈아입혀 다시 학교에 보냈다. 난 그때 학교에 다시 돌아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이들은 내 바지에 묻었던 설사를 봤는데..., 그러나 막상 엄마는 나를 학교에 보낼 줄만 알았지 정작 엄마가 학교에 가야 하는 상황을 몰랐나 보다. 그래서 전학 간 첫날, 나를 학교에 맡긴 그날, 엄마는 담임선생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고 시간이 지난 후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고, 난 생각에 잠긴 아이가 되었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계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에게 그 말을 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엄마 계모냐고 물었다고. 그리고 그날 엄마가 울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가 우울해했다. 그래도 엄마는 학교에 가 보지 않았다. 



난 엄마의 과거에 대해 모른다. 알려고 한 적도 없고 알고 싶어 한 적도 없다. 엄마가 말해주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냥 기억이다. 엄마는 욕지도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아직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사촌들과 같이 지내다 부산의 어는 친척집의 양녀로 들어갔단다. 사업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첫째 부인에게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자식이 없는 둘째 부인을 위해 엄마를 양녀로 들여서 엄마는 그 집의 막내딸로 자랐단다. 엄마의 언니는 할아버지의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교육관으로 인해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엄마는 할머니(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교육관으로 중학교까지 다녔다. 엄마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부잣집에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자란 엄마는 22살에 할아버지의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를 만났고(할아버지는 아버지 외가 쪽의 친척이었다.) 사랑을 하게 되어 연애를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여 집을 나왔단다. 그래서 아미동 산동네에 집을 얻었고 첫째인 내가 태어나고 나서 혼인신고를 했단다. 그래서 아빠는 원양어선을 탔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육지에 내려 집에 와서 지내다 다시 배를 타기를 5번을 반복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엄마는 미장원을 차렸다. 

영도의 미장원에 대한 기억은 육영수여사의 저격사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저격이 있던 그날은 방학이었다. 미장원에서 흑백테레비로 행렬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고 이리저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엄마가 그만 봐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테레비에서는 장례행렬을 방송했다. 

그 여름 흑백테레비의 화면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 들리면 그 테레비의 화면이 기억난다.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은 입술을 꼭 다문 여자의 사진이 국화꽃으로 덮인 차량 행렬 중간중간에 나오던 그때의 화면은 내 어린 시절의 여름에 대한 기억이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기억하는 그 한 부분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인 이 글은 선생님을 빌어 엄마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도 내 기억 속에서 묻혀있다 최근 내가 만난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내면서 기억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물론 나의 충격적인 중학교 영어선생님과 함께 말이다. 

학생이었던 시절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좋은 기억만은 아니라는 게 흠이다. 예전, 채벌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던 시절에 단체 기합 한 번 받아보지 않은 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단체 기합에 대한 기억은 친구와 함께 지낸 추억으로 남아있고, 그 기합을 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간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독으로 채벌을 받았거나 반성문을 쓴 경험은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런 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자신의 편의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내 기억도 나의 편에서 조작된 단편일 것이다. 그 기억 속에서의 한 마디의 말이 이렇게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어린 시절 상처이다. 나의 상처. 그리고 엄마의 상처.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1학년 담임에 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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