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를 선택하게 해 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공부 분투기.
중년의 인생에 있어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으로 되어버린지는 이미 오래지만 10대의 일 년은 길다. 그것도 아주 길다. 20대의 일 년도 숨이 막힐 정도로 아주 많은 일들이 생기고 지나가는 시간이다. 30대가 되면서 일 년은 불안한 마음과 함께 지나가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40대의 일 년이란 시간은 날짜를 세면 지나가는 일 년이다. 하루가 짧아지고, 아무 일도 없이 일주일이 지나버리고, 문득 정신 차려 날짜를 생각해 보면 연말이 코앞이고, 또 한 살을 더하게 되는 새해가 시작된다. 그렇게 어영부영 50대가 되고, 시간은 나를 버려두고 저 혼자 뜀박질을 하면서 60대가 된다.
나도 어느새 어영부영하는 50대가 되었고, 뜀박질하는 60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나이에 20대의 시간을 돌아보니 그 시간들은 어느새 흑백사진처럼 아득하다.
1984년은 내가 대학생이 된 해이면서 한국 나이로 20살이 되었다. 난 1983년 4년제 지방대학의 국문학과를 지원하여 합격하였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이것저것 생각은 많지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경제적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문계를 졸업한 나는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고, 또한 만 18세의 미성년자였다.
어느 날, 여상을 졸업하고 어느 작은 사무실에 면접 보러 가는 친구 따라 갔다가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하루를 출근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전화를 받는 것조차 쑥스럽고 어색했다. 나에게는 한 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의 흑역사이다.
당시 서대신동의 일본숙사건물이 즐비하게 있던 골목의 한 집에서 여동생과 둘이 생활하던 나는 그곳에서 고등학교 2년을 다녔다. 그곳은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각 골목 입구에 공동화장실이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다. 일본식 건물의 잔재가 남아있지만 연탄아궁이가 존재했다. 똑같은 구조의 집들이 쭉 연결된 곳으로 나무로 된 현관문을 열면 시멘트로 만든 물탱크가 한쪽을 차지하고 아래로 파인 연탄아궁이가 방 두 개를 연결해 주며, 나무판자가 깔린 좁은 마루를 지나 바로 방이 연결되는 일제강점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의 집이다. 집에서 나와 골목을 빠져나오면 큰 길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나왔다. 그리고 근처에는 남자상업고등학교가 하나 있고, 그 옆으로 구덕운동장이 있었다.
1983년, 나는 자괴감과 우울에 빠져 공상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디오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다가 채택되어, 당시 중앙동 시청 근처의 부산데파트 맞은편에 있던 MBC부산방송국에 선물을 받으러 가게 되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나의 동안으로 주민증과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본인 인증 과정을 거쳤다. 그때 나의 사연을 읽어 주었던 DJ가 "글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의 느낌이었는데"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까지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쯤, 여대에 진학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같이 재수하지 않겠냐고, 난 망설였다. 공부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학원 다닐 형편도 아니었던 내 상황을 드러내 놓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친구는 본인이 학원 수업 마치고 나면 그녀의 집에서 나랑 같이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원에서 받은 교재를 같이 공부하자는 제안이었다.
그 친구는 교육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결심했는데, 도저히 혼자서 공부가 안 될 것 같아, 같이 공부할 사람을 찾던 중 내가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않았다는 이야길 듣고 혹시 교대 갈 생각인지 물어왔다.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이란 직업은 여학생들의 부모가 선호하는 직업이었고 결혼시장에서도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인 국민학교 교사는 부모님들에게 매력 있고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보장되는 직업이었다. 나도 막연히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 지내던 터라 친구의 공부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1983년 여름, 친구와 나는 매일 버스정거장에서 만나 친구집에 도착하여, 그날 배운 과목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고 거의 10시까지 공부를 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공부하고 토요일은 공부와 함께 음악이야기나 책이야기, 인생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일요일은 하루 쉬었다. 그 토요일에 우린 스모키, 알이오스피드웨건, 닥터훅, 비지스 등등과 팝, 락큰롤 등을 들으며 음악이야기, 책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친구는 몇 개월의 대학생활로 대학의 낭만을 약간은 맛본 상태였고, 난 친구를 통해 대학의 낭만을 알게 된 상태였다. 친구와 난 일요일은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었지만 난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오전 시간에는 거의 공상과 한숨으로 보냈다. 하늘을 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땅만 쳐다보며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항상 우울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 우울한 오전을 보내고 나면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 공부를 했다.
기억으로도 당시에는 공부가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했고 한 번 했던 공부라 쉽고 잘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도 하기 싫던 공부가 왜 갑자기 잘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공부는 재미있었다. 친구와 같이 풀어보는 문제도 잘 풀어졌고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던 내가 친구에게 가르쳐주는 부분도 생겼다. 친구의 엄마는 저녁을 항상 챙겨주었고, 가끔 먹거리를 싸주기도 했다. 친구엄마는 같이 하는 공부가 부담되지 않게 거의 대부분 자리를 피해 주었고, 가끔 마주치면 항상 '고맙다'라고 말했다. 같이 공부해 주어서 고맙고, 같이 말벗되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난 딱히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나의 미래를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시간을 친구에게 투자하고 있는 입장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 원서를 써야 할 때쯤, 아버지에게 입시를 본다고 이야기했다. 입시를 위한 원서작성을 하기 위해 방문한 학교에서 3학년 때 담임을 만났다. 그는 수학과목을 가르치는 수학선생님으로 항상 내 이름을 "@@!"이라고 이름 두 글자만 똑 부러지게 불렀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약간 배가 나온 그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난 항상 어색하고 느끼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선생님이 부르는 거라 별 내색을 하지 못했다.
3학년 때 담임은 '너 학교 다니고 있지 않니? 난 너 학교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교나 학원은 합격한 것이 중요하지 입학을 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모든 플래카드에는 "축 합격"이라고만 쓰여있다. 나도 당시 모교의 합격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입시원서 작성을 위해 학교를 방문했으니 담임은 놀랐을 것이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국문학과'에 합격했는데... 아마도 학교부적응으로 생각했을게다. 그렇게 난 입시원서를 작성했고, 시험을 치렀다. 성적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10점 정도 더 나왔던 것 같다.
시험 후에는 의례히 어느 학교를 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친구는 계획대로 교대를 지원하면서 나에게도 권했다. 하지만 난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적성이 안 맞는 듯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직감으로 생활했던 중학시절에 '나는 커서 직업이 간호원이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불현듯 났다. 왠지 나의 직업은 간호원(지금의 간호사라는 직업명이 당시는 간호원이었다)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중학시절의 나는 나의 미래가 예견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나의 미래를 예측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무당들이 영이 맑다고 표현하는 그런 낌새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불교를 접하지 않았고,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면 신을 모시는 일을 했을 것 같은 생각이 가끔 든다. 예전 어느 점쟁이가 나에게 "피 보는 직업 아니면 나랑 같은 일 해야 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는 내 기억에서 난 그렇게 간호대학을 선택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간호대학에 등록을 했다. 내 성적으로 당연히 간호대학은 갈 수 있었다. 단지 학교의 선택이 문제였다. 당시 부산에는 5개의 간호대학이 있었다. 하나는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신대 간호과', 또 하나는 가깝지는 않지만 버스 한 번에 도착하는 '춘해간호대', 그다음으로 먼 동래구에 위치한 '대동간호대', 그리고 같은 동래구의 '부산대학교 간호학과', 마지막으로 가장 멀리 위치한 '지산보건대간호과'였다. 멀리 위치한 3개의 대학을 제외하면 '고신대 간호과'와 '춘해간호대'가 남았다. 당시 종교란에 '불교'라고 적는 나에게는 고신대는 제외대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춘해간호대. 당시에는 종교색이 없는 학교였다.
문제는 입학 후 학교의 학장은 기독교를 채택하여 난 '채플'이라는 필수선택과목을 학습해야 했다.
그렇게 1984년, 간호과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하여 난 춘해간호전문대학의 84학번으로 입학을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학교생활에서의 공부는 왜 그렇게 하기 싫고 어렵기만 하던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학교 다닐 때의 공부는 그렇게 힘들고 어렵기만 한지......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여 간호사면허를 취득하고 나서 임상현장에서는 공부를 안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생활에서 무슨 세미나와 선배와 사수의 숙제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면 쌩까는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삼키며 하는 공부는 왜 그렇게도 어렵던지.
취직하고 나서는 분노하며 공부하고, 자존심 상해서 공부하고, 잘난 체 하려고 공부했다. 그렇게 한 공부가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슨 공부에 한이 맺혔는지 그렇게 저렇게 공부를 하다가 30을 바라보는 나이에 '경영학과'에 편입학을 하여 경영학 공부를 했다. 그때는 병원의 구매담당자를 거쳐 원무과장이나 총무과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공부였다. 하지만 그 꿈은 무산되었고, 이후 중간관리자인 수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인정받는 수간호사로 몇 년의 근무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무난한 시간을 이어가던 중, 나이 든 의사의 '간호사 주제에'라는 무시가 가득 담긴 말투에 대한 분노로 50이 넘은 나이에 대학원을 진학했다. 결국 학위를 취득했고, 지금은 그 학위를 가지고 대학에서 강의도 한다.
또한 이렇게 작가가 되기 위해 또다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때 가보지 못한 국문학과의 길을 지금 가고 있어, '언제인가 국문과 공부를 꼭 하리라' 생각한 것을 지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공부라는 것은 하면 도움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내 경험에 비추어 "공부는 졸업하고 나서 하는 것이 진짜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그때 재수를 하게 해 준 친구를 난 아직도 기억하면서 고마워한다. 그 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그 아이는 졸업을 하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직도 교직에 종사하는 현직 선생님이거나 행정직 선생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참 감사한 인연이다. 그녀로 인해 난 '피를 보는 직업'을 선택하여 많은 경험을 하고 또 이렇게 글을 쓰면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