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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Nov 14. 2023

짝사랑? 첫사랑? ; 기억이기에 아름답다.

10대의 인연들 ; 

국민학교 저학년의 기억은 앞에서 이야기한 전학 온 1학년때의 기억 외는 없다. 나의 본격적인 국민학교시절의 기억은 4학년 때부터이다. 아마도 4학년 9반이었다. 그해 4학년 9반과 10반은 제주도 교실로 불렀던 본 건물 뒤의 작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가 끝나는 산등선 아래에 달랑 두 개의 교실만 존재하는 작은 건물에서 수업을 했다. 그 외따로 떨어진 교실에서 난 마음에 드는 남학생을 만났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길 하겠다. 



그는 백인같이 하얀 피부를 가졌었다. 아무래도 혼혈인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이었다. 갈색빛이 많은 진하지 않은 머리색에 하얀 피부, 그리고 갈색 눈동자. 그 아이를 본 순간 난 자꾸만 끌렸다. 4학년 반 배정을 받은 그 주에 학급 임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부반장을 하라고 했는데, 난 그때 왜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옆으로 저었고 난 뜬금없이 '선생님, 난 부반장을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해버렸다. 일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졸지에 난 선생님에게 고집쟁이가 되어버렸다. 그전까지 나는 고집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 난 내가 고집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선생님은 나를 설득하여 부장이라도 시키려고 했지만 난 그것마저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결국 문예부장을 맡게 되었다. 그 후부터 교실에서 그 아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 달쯤 후에 그 아이는 전학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 반 아이들에게 작별인사 후 부모님과 함께 떠나기 전, '잘 지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난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했고, 그는 떠났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그가 떠났고, 난 그날 이후 간간히 그 아이를 생각하며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밥을 먹었다. 

왜일까? 왜 하필이면 운동장가 쪽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아래에서 밥을 먹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아이들이 송충이가 떨어진다고 겁을 주어도 그 소나무 아래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아마도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의 4학년 1학기가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첫사랑이나 짝사랑에 대해 물었던 20대의 어느 날부터 언제나 기억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그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을 난 모른다.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아이를 똑바로 쳐다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 아이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기억에 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할 때의 그 하얀 손과 그 많은 아이들의 시선, 그렇게 아버지의 까만 자동차를 타고 전학 간 그 아이가 나에게는 신경 쓰였던 남학생이었고, 그렇게 내 감정을 밝히지도 못하고 떠나간 짝사랑이었다. 

짝사랑이었던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또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인 대입학력고사를 치르고 난 후(난 학력고사 세대다. 3살 많은 옆집 언니는 본고사 마지막 세대였다), 유행처럼 많은 아이들이 소개팅을 했다. 소개팅 제의를 받지 못하면 성격이 이상하거나 못생긴 아이로 낙인찍히고는 했다. 그 시절 여고를 다니던 우리들에게 남고 아이들과의 소개팅은 주로 빵집에서 이루어졌다. 나도 그때 친구들 몇과 어울려 동삼동의 '하늘공원'이라는 빵집에서 소개팅을 했다. 

나의 파트너가 된 아이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듯 애프터 신청을 했고, 난 그 아이가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나의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거절을 했다. 그 거절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는 내 말에도 버스를 타고 따라왔다. 그때 집이 대신동이던 나는 중간에 내려 청학동에 사는 현주라는 친구집으로 향하면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다음 만날 약속을 정하려고 했지만 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아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깔끔하게 생긴 외모 덕분인지 공부 잘하는 모범생 같이 보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종교단체의 아이들과는 분위가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난 그의 에프터를 어렵게 거절하고 친구집에 가서 놀다가 집에 갔다. 그리고 그 아이를 기억에서 잊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자서전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기억해 내면서부터 그 아이가 툭 튀어나왔다. 그 만남 후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지냈는데도 말이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아이의 에프터를 받고 만났다면 그 인연이 20대 시절까지 연결되었을까?'라는 생각이 그 아이의 기억 이후-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스치고 지났다. 

어쩌면 그때의 선택으로 나의 남성관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과는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할 수 도 있었던 갈림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증 때문일지도.


기억은 기억이기에 아름답다고 한다. 현실은 기억만큼 아름답지도 멋지지도 않다. 그냥 현실이다. 현실은 항상 담백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속하는 일상이다. 그 일상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나의 호르몬분비에 의한 환상을 뇌세포에 박아 놓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기억해 내는 횟수가 잦을수록 색을 더하거나 변화시켜 더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누가? 내가, 어디서? 내 뇌세포에서. 그래서 기억은 기억으로 아름답다. 나의 기억은 나에게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이런 나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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