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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생 Feb 27. 2021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문체 연습 1



무라카미 하루키는 특이한 소설가입니다. 전 세계에서 작품을 가장 많이 파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비판을 가장 많이 받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봐온 바에 의하면(좁은 식견이긴 합니다만), 비난이 아닌 비판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 대부분은 '하루키 문학은 자기 복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루키는 자기 복제나 계속하는 퇴물이다! (앞서와 뉘앙스가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쪽의 의미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비판은 이 책을 통해 해소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실 왜 자기 복제라고 비판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내부의 에너지를, 마음 깊숙이 잠들어 있는 무언가를 글을 통해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소설가가 작품을 쓰면서 '이 인물은 이러이러한 상징을 지니고, 이러이러하게 해석할 수 있어.'라는 설정을 의도적으로 '부여'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건 비평가와 독자의 몫이죠. 따라서 어떤 작가의 작품이 일관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글들이니까요. 기본적으로는 같은 법칙을 공유하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게 되겠습니다. 즉 같은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어떤 '일관성'이랄지, 비슷한 '느낌'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슷한 느낌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자기 복제라고 하는 것은 무척 부당한 처사입니다. 이야기 전개가 90% 같다거나 한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사실 하루키는 '자기 복제'보다는 '자기 혁신'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소설가라는 게 제 견해입니다. 판매량이 많고 대중적이다 보니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어떻게든 저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만 말해보자면, '인칭'에 대한 하루키의 견해입니다. 하루키 작품을 분석할 때 인칭에 주목할 필요가 좀 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스스로 일인칭에서 시작해 삼인칭으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그가 왜 <일인칭 단수>를 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거 같아요. 아마 <일인칭 단수>는, 세계의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서 무수한 경험을 한 여행자가 마침내 그리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풀어놓을 기나긴 모험담은 무엇이 될지 정말 기대되는군요 - 라고는 해도, 제 해석이 바르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겠습니다만.



평점은 6점입니다(5점 만점). 왜 5점 만점인데 6점을 줬냐는 의문이 당연히 드실 겁니다. 이는 영어 단어 priceless와 관련 있는 제 특이한 경험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priceless는 '매우 귀중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저는 price + less니까 당연히 '가치가 없다'는 뜻이구나! 라고 뜻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놓고는, 그 단어를 이상한 상황에 써버려 매우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5점 만점의 평점을 매길 때 6점은 저에게 매우 가치 있는 작품,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인생작'쯤 되는 작품에 매기는 점수가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내 인생작이 되었다." 쯤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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