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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선영이 아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너는 왜 알면서 나한테 말 안 해줬니? 그랬다. 나는 선영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선영에게 그 남자랑 잘 안됐다고만 말했지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다. 얘기는 선영이가 했다. 그날 내 하숙방에 찾아온 선영은 아버지의 넷째 손가락이 잘린 얘기를 했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그랬다고, 그런데 절단된 조각을 차갑고 축축하게 보관해서 병원으로 가져가야 하는 걸 그걸 그냥 손에 쥐고 가서 봉합수술이 잘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영은 이 이야기를 대학 친구들에게는 하지 않았고 내게만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자신의 절단된 손가락을 쥐고 달려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가 눈물이 났다. 선영의 결혼식장에서 흰 장갑을 낀 선영의 아버지가 선영의 등을 토닥일 때처럼 울었다. 아버지의 손은 너무 뜨겁고 건조했을 거라는 선영의 말을 듣는데 내 손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선영은 울지 않았다. 얼굴에 뭐가 꽉 차 있었지만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웨이? 웨이?”
내가 대답하지 않자 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메시지가 들어오는지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번엔 선영이 아니었다. 어플에서 울린 메시지 알림이었다.
- 왜 말도 없이 갔어요? 잘 들어갔어요?
갑자기 얼굴로 무거운 것이 쏠렸다. 나는 쏟아지는 걸 받치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번 보았을 뿐인데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는 손을 떼고 얼굴을 뒤로 젖혀 흔들었다. 다시 고개를 숙여 번호를 길게 누른 다음엔 메시지를 지웠다. 수신도 차단했다.
정체는 여전했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비상 급유 서비스를 신청했다. 그리곤 기어를 아예 P로 옮겨 놓고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창문을 내렸다. 1차선에 있는 카니발의 뒷좌석에 탄 아이가 나를 바라봤다. 뭐에 심통이 났는지 뚱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보더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창문을 올렸다. 나는 사춘기 시절에나 일었을 법한 반항심으로 담배 연기를 더 길게 내뿜었다.
주위의 차들을 둘러봤다. 차들은 제자리에서 다만 부릉댈 뿐 서로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간 정체가 풀릴 것이다. 하지만 정체가 풀리는데도 불구하고 내 차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내 차는 움직이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차들에게 영향을 미칠 터였다. 내 차가 곧 멈추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곤란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쩐지 비밀을 품은 듯이 여겨졌다. 어떤 책에서 그랬더라.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나는 내 비밀을 누군가 알아챌까 봐 겁이 났었고 아무도 모르는 게 두려웠었다.
차 안은 곧 매연과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선영의 꿈속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을지를 상상했다. 자연사는 아닐 것이고 병이 났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살해됐을 것이다. 병이라면 암일까, 전염병일까. 사고라면 추락사일까, 익사일까. 살해라면 교살일까, 참살일까. 각각의 가능성이 만들어낼 세부적인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기다렸다. 도로의 정체가 풀리기를. 그래서 도로 한복판에 멈춰있는 내 차가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차들에 영향을 미치기를. 어느 차들이고 내 근처에 와서는 속도를 줄여야 할 것이다. 당황하며 핸들을 틀고 경적을 울릴 것이다. 누군가는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언제 들이받힐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시각각 덮쳐오는 위협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담배를 다 태운 뒤,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적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눌렀고 잠시 뒤, 너희 아버지 손가락은 잘 붙었느냐고 묻는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졌다. 자동차의 창문을 올려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동이 꺼졌다. 차체의 떨림이 완전히 가라앉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
*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는 말은 이상의 단편소설 「실화」에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