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줄곧 궁금했다. 선영의 꿈에서 내가 어떤 얼굴과 어떤 자세로 죽었을지. 갑자기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여보세요?”
내가 다시 말하자 선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인주야. 지금 애가 울어서,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휴게소에 들렀으니 그만큼 시간이 지체됐을 터라 급하게 몇 모금을 빠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특산품을 파는 매대 근처에 한 여자가 우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뿌리염색을 할 때가 지나 두피 언저리는 까맣고 아래는 푸석한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였다. 여자는 보채는 아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이제 그만 좀 울라고, 잠 좀 자라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내려놓았던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며 엄마가 된 선영을 상상했다. 선영도 아기에게 울지 말라고 애원할까? 제발 잠 좀 자라고 사정할까? 잘 상상되지 않았다. 원하는 건 어렵지 않게 얻어내던 주선영이 절절매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선영도 변했을지 모른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건 엄청난 경험일 테니까 그 경험이 어떻게든 선영에게 영향을 미쳤긴 했을 것이다.
선영은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다. 재밌는 일이었다. 선영은 수학을 못했다. 옷을 살 때 현금으로 하면 10% 빼준다는 주인의 말에 얼마나 할인되는지 계산하지 못했고 거스름돈을 잘못 받은 것도 몰랐다. 선영은 전형적인 문과생이었다. 수학은 내가 잘했다. 엄청 잘한 건 아니고 고2 때 문과와 이과로 반이 나뉘고 반에 문과 학생들만 모이게 되자 나는 자연스럽게 수학을 잘하는 축에 속하게 됐다. 선영은 수학 문제를 풀다가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내게 묻곤 했다.
“야, 넌 다른 땐 안 그러는데, 수학 문제 풀 땐 척척이구나.”
수학 문제를 척척 잘 풀던 나는 통역을 한다. 이건 재밌지 않다. 사장은 사람들에게 중국인답지 않게 깔끔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사장에게 통역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통역한다면 그대로 해도 될지 고민하다가 얼버무리곤 한다. 생각 끝에, 깔끔한 중국인이시네요, 라고 통역하면 되겠다고 정해놓았는데 그렇게 정해둔 뒤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바로 이런 게 재밌다. 사장은 내가 통역하는 나를 바라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이 사람, 한국말을 다 알아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고속도로 주행에 익숙해지면서 속력을 높였다. 커피와 담배의 힘 덕분이기도 했고 다른 차들이 워낙 빠르게 달리니 속도에 둔감해진 것도 있었다. 이제는 제한속도 100킬로를 넘지 않도록 감시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살짝 브레이크를 밟기까지 해야 했다. 나는 핸들에서 오른손을 떼고 팔꿈치를 콘솔 쿠션에 얹어도 봤다. 아, 이런 게 어른이었다. 차만 가졌다고 어른인 게 아니라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도 의연한 포즈를 취할 수 있어야 어른이고말고. 지금 가는 곳이 산이나 바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달려서 도착하는 곳이 푸른 산이거나 시원한 바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을 많이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산정호수도, 헤이리도, 두물머리도. 양양이랑 속초도 갈 것이다.
나보다 느리게 달리는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내 차도 다른 차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마침 날 위해 준비된 것처럼, 내 앞에 초보 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천천히 달리는 경차가 나타났다. 선팅을 거의 하지 않은 경차는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생물 같았다. 운전자 홀로 타고 있었고 백미러에 걸린 기다란 깃털 장식은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차 뒤로 차를 몰았다. 잠시 달리다가 보란 듯이 추월차로로 차선을 옮긴 다음 다시 경차 앞쪽으로 차선을 이동했다. 백미러로 경차가 순간 멈칫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관절을 가진 생물처럼 움찔 떠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것도 신기했다. 내 차가 더 빨리 지나갈 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