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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차는 바퀴 네 개만 잘 굴러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좋은 차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차는 일시적으로나마 상대를 쩔쩔매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좋은 차는 영향을 받기보다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엔진을 달고 있었다. 내게 영향을 주었다가는 너도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 행동에 집중하다가 그만, 대전 IC로 빠져나가는 길을 뒤늦게 발견하고 말했다. 차로를 급히 옮기기에는 3차로에서 덤프트럭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2차로에서 속도를 늦춘 채 미적거리는 내 차를 향해 뒤에서 오고 있던 화물차가 길게 경적을 울렸다. 차체가 웅하고 떨릴 만큼 큰 소리였다. 나는 당황하며 다시 액셀을 밟았다. 이렇게 된 거 무리해서 빠지기보다 앞으로 가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돌아가겠지만 길은 어디든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내비게이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5km를 더 가면 비룡 분기점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고 잠시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와 판암 톨게이트로 빠져나오면 됐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차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차량의 흐름이 더뎌지더니 분기점에 다가서기도 전에 길이 결국 꽉 막혀버렸다. 순식간에 세 개의 차로가 그대로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리던 나는 주유 경고등이 깜빡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기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내 정신 상태도 발견했다. 대체 왜?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휴게소에서 주유를 하지 않은 거지?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주유에 대한 생각만 핀셋으로 쏙 뽑아낸 것 같았다. 남은 기름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정체가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었다. 이곳이 원래 이렇게 밀리는 구간인지 아니면 또 사고가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비게이션에는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았다. 도착 예정 시간은 차곡차곡 늘어났다. 미팅 시간에 늦는 건 둘째 치고 기름이 다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를 만날 수 있을지부터가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갓길에 차를 세우고 보험회사를 부르는 게 나을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3차로로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었다. 하지만 차로에 길게 늘어선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갑자기 멈춰 선 도로 위의 차들 모두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나는 우측 깜빡이를 껐다.
이제는 정체가 곧 풀린다고 하더라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나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너무 밀리네요. 죄송해요. 좀 늦을 것 같아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팅은 어떡하라고요.”
“죄송합니다. 지금 고속도로 위라서 저도 방법이 없네요.”
“아니, 인주 씨. 이러면 곤란한데, 이러면 곤란해요.”
사장은 곤란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워 유 마뺀러, 워 유 마뺀러. 통역하다 보면 중국어가 중국어로 들리지 않고 곧장 한국말로 들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사장이 중얼거리는 말은 중국어도 아닌 한국어도 아닌, 아무 의미도 담지 않은 주문처럼 들렸다. 워 유 마뺀러, 워 유 마뺀러.... 주문이라면, 이 상황의 해결을 기원하는 주문이기를 바라며 나는 잠자코 사장의 주문을 들었다. 주문이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가만히 듣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