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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Dec 18. 2023

유배의 시간

 어제는 평소보다는 늦게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보통은 오후 4시 전후로 데리러 가는데 어제는 시골집에서 글을 쓰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오후 5시 30분쯤 도착하게 되었다. 등원하러 갈 때마다 아이는 내게 “엄마! 오늘 엄청 엄청 일찍 데리러 와줘! 나 낮잠 들었을 때 데리러 와 줘야 해! 늦게 오면 안 돼~!”라고 당부의 당부를 하곤 한다. “그래~알았다.”라고 대답은 해 뒀지만 매번 아이가 원하는 시간대에 데리러 갈 수는 없다. 내가 어린이집에 도착하자 아이는 강아지처럼 뛰어나와서 활짝 웃으며 내 품에 폴짝 안겼다.

아이는 교실에 벗어둔 외투를 입고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하원 준비를 마치고 담임 선생님과 함께 나왔다.

나는 주춤 거리며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선생님의 표정에서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감지했다.

나의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적중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00이가 오늘 제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여자 친구 얼굴을 할퀴어서 여자아이 눈 밑에 상처가 났어요. 여자 친구 어머니께서 하원 시 무척 속상해하시며 가셨어요.”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 오늘 어린이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나요? 00아 너 여자 친구 얼굴을 할퀴었어? 왜 할퀴었어? 엄마가 친구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지. 사랑하고 아껴줘야지 할퀴고 때리면 못쓴다고 했지.” 그러자 아이는 내게 여자 친구가 먼저 자신을 할퀴었다고 그랬다. 자세히 보니 우리 아이 콧등에도 작지만 선명한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시는 건지 모르시는 건지 우리 아이의 상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여자아이가 더 많이 다쳤다고 하니 어쨌든 가해자 아이의 엄마가 된 것 같은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이가 어쩌다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얼굴에 상처가 나서 오면 정말 속상하고 화가 나는 부모의 마음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 어쩌면 좋죠? 여자 친구 어머니 너무 속상하시겠는데요? 제가 따로 전화를 드려서 사과를 드리고 안부를 살피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등원할 때 흉터 연고 하나 사다가 전달해 드리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주셨다.

 나는 선생님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가정 교육에 힘쓰겠다고 연신 강조를 하며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특히 인성과 관련된 부분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몰라 어버 버버 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엄마라는 직업은 정말 공부해야 할 것도 많구나.’ 긴 숨을 내쉬고는 핸들을 돌리며 집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아이에게 그렇게 친구를 할퀴거나 밀거나 때리는 행동을 하면 아무도 너와 놀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항상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친구는 나처럼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해 주고 안아주고 아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과 약속은 찰떡같이 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어린이집 가면 여자 친구에게 마데카솔이랑 사탕 갖다 줘. 많이 아팠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해. 앞으로는 할퀴지 않을 테니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하고 안아줘. 알았어?”“네!”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대답을 하고 배가 고팠는지 호두과자 5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더니 그대로 카시트에서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어제 얼마나 피곤했는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올라와서 침대에 눕혔는데 깨지 않고 그대로 오늘 아침 9시까지 쭉 잤다.

 통잠은 우리 아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기이다. 내가 아이를 낳는 동시에 암이 발견되어 표준치료를 받게 되면서 출산 후 사실상 거의 6개월 정도는 친정 엄마께서 갓 난 아이를 봐주셨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엄마 손을 덜 타서 그런지 등 센서도 없었고 어릴 때부터 통잠을 자며 엄마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주변 엄마들은 밤마다 깨고 보채고 엄마를 찾는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야단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아들은 하늘이 내게 보내 준 천사임에 틀림없다. 그런 아들이 벌써 4살이 되어서 저렇게 삐약삐약 병아리처럼 말도 잘하고 날다람쥐처럼 다다다닥 뛰어다니다니 감회가 새롭다.

 어제 일찍 잠들어 준 아들 덕분에 나는 책도 읽을 수 있었고 못다 쓴 글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져서 보니 아이는 예쁜 두 눈을 감고 아직도 콜콜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50분이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이를 닦은 뒤 물을 한잔 마시고 과카몰리를 만들었다. 아침 샐러드로 과카몰리를 파프리카에 얹어서 남편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 겨울의 첫눈이었다. “눈이다!” 설렘과 기쁨이 담긴 나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리 남편은 건조하고 투박한 음성으로 “아이고, 눈이 오네. 오늘도 날씨가 엄청 춥겠다. 길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남편은 시선을 다시 창문에서 접시로 옮겼다. 남편은 눈이 내리는 풍경 따위에는 별 감흥도 관심도 없는듯했다.

나는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었는데도 눈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 썰매를 타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창고에 있는 트리를 꺼내서 예쁘게 장식을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하얀 눈이 좋아서 항상 겨울이라는 계절이 기다려졌다. 그런 겨울이 오면 언제나 눈이 내렸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행복과 환희를 느꼈다. 나는 눈밭에서 신나게 달리는 썰매 개 시베리아허스키처럼 스키를 좋아했다. 눈밭에 넘어지고 자빠져도 깔깔깔 그저 웃음이 나왔다. 하얀 눈으로 덥힌 슬로프를 멋지게 가르며 쌩쌩 내려올 때는 너무 시원하고 싱싱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스키를 타면서 싱싱한 인생이란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곧바로 암도 낳게 되어 육아하랴 치병하랴 4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매년 함박눈 내리는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말괄량이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창밖에 눈이 오면 아이를 안은 채 멀리서 가닿기 힘든 스키장을 그리워했다.

 육아와 치병이라는 짐은 둘 중에 하나만 들기에도 버겁고 힘든 무게감이었다. 나는 육아 하나만으로도 매일 헥헥 거리며 진땀을 뺐다. 사실상 아이를 낳고 3년 동안은 그저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치병은 꿈도 못 꿨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하루 3시간 만이라도 아이 없이 혼자 산책을 하고 차 한 잔 마시거나 낮잠을 잘 수 있는 틈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얻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도 마음 놓고 쉴 수는 없었다. 수북이 쌓인 똥 기저귀와 설거짓거리, 이유식 등등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아이가 고열이 나서 아프기라도 하면 밤을 새우며 뜬 눈으로 아이 곁을 지키며 애간장 녹는 밤을 보내곤 했다. 나는 확실히 수술 후 회복할 틈 없이 육아 전선에 뛰어들면서 오래된 자동차처럼 드르륵드르륵 잡음을 내며 잘 달리지 못했던 것 같다.

금방 지쳐버리고 기력을 못 차렸다. 육아 문제로 남편과 싸우고 다투는 날도 많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것 같다고 느낄 때쯤 어깨, 등, 목 통증으로 괴로워했다.

 한의원과 통증의학과를 다녀도 일시적으로 잠시 좋아지는 듯하더니 다시 통증이 원상 복귀되었다. 나는 설거지와 같은 단순노동도 목,어깨, 등 통증으로 힘들어했다. 아이를 안거나 시장을 보고 물건을 들고 오는 것도 힘들었다. 운전을 할 때 핸들을 돌리는 일도 힘들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움직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이는 울고불고 안아 달라고 떼를 쓰는데 안아줄 수가 없었다. 아이랑 같이 주저앉아서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엄마도 널 안아주고 싶어. 그런데 안아줄 수가 없는걸 어떡해. 미안해. 엄마를 이해해 줘. 아가야.” 엉엉 우는 엄마를 보고 엉엉 울던 아이가 눈물을 그쳤다. 나는 한국의 여성들이 왜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지 전쟁터 같은 육아의 현장에서 아이를 키워내며 온몸으로 끄덕거렸다.

 아이가 어느 정도 어린이집 들어갈 만큼 크자 몸에 이런저런 이상 신호들이 나타났다.

나는 20년 1월에 출산 후 받았던 희귀암 수술 이력이 있었기에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에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곤 했다. 결국 나는 22년 9월 중순에 받은 정기 검진에서 폐에 종양이 발견되어 폐전이 소견을 받게 되었다. 20년 1월 첫 암 선고를 받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2번의 추적 검사 이후 신속하게 흉강경 수술 날짜까지 잡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 같은 경우는 악성 희귀암으로 암의 크기와 기수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의학적 근거로 참고할 만한 데이터도 없다고 했다. 재발률이 워낙 높아서 재발할 때마다 수술을 하는 방법 외에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해가 지고 있는데 전화도 터지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조난을 당한 것처럼 공포와 불안이 엄습해 왔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공포와 불안에 휘둘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암 관련 전문의들을 검색해 보며 정보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연치유의 길을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난 당한 나를 구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길이 어느 길인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누가 나를 구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내게 묻고 또 물었다. 정보를 검색해 보다가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가는 말기 암, 희귀암 환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 의학으로 안 되는 것이면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냐’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데이터가 없다고 하니 ‘현대의학’이라는 어떤 의학적 울타리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나의 처지가 안타깝고 씁쓸했다. 당시에 나는 ‘자연치유’라는 말이 너무 생소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치유된다는 말인가? 대학 병원에서도 데이터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피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의사의 말을 여과없이 흡수했었던 건지 그런 나의 모습이 낯설기까지 하다. 나의 고유하고 소중한 생명을 어떤 믿음으로 의사에게 온전히 몽땅 내맡겼던 것인지 모르겠다. 자연치유는 우리 몸에 본래 자연치유력이 있어서 치유적 환경이 조성되면 신체의 회복 능력이 좋아지면서 질병이 저절로 낫게 된다는 개념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으로 잘 다가오지 않았다.

 몇 군데 자연치유 전문의가 있는 자연치유 전문 병원도 방문해 보고 진료도 받아보았으나 그 치료 비용과 약값 등등의 견적을 고 혀를 내 둘렀다. 나는 이렇게 몇 달을 방황을 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내 병은 내가 고치고 나는 내가 구원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자연 치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가족회의를 열어서 가족들에게 나의 뜻과 포부를 밝혔다. 가장 크게 반대했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의사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하냐며 한국 의료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고 진보적인데 무슨 객기를 부리느냐는 식이었다. 수술을 받고 자연치유를 해도 되지 않느냐고 나를 설득했다. 나의 부모님은 나의 대쪽같은 성미를 이미 잘 알고 있어서 침묵을 지키다가 수술을 하고 자연치유를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나는 갈대처럼 작은 바람결에도 수없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남동생과 남동생 와이프는 나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불안하고 두렵지 않겠냐고 했다. 자연 치유의 길은 이런 점에서 정말 험난하고 외로웠다.

 그 길을 결심하는 일도 용단이 필요했지만 그 미지의 길을 걸어가는 당사자는 사실 가장 큰 응원과 격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도 나를 응원해 줄 수도 격려해 줄 수도 없었던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3살배기 어린 아들은 엄마의 이런 절박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가는 개미만 만나도 행복하고 즐거워했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아이의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은 내게 주어진 마법의 거울 같았다. 나의 자연치유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이 냉혹한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는 딸을 보면서 수없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부모를 바라보는 일은 더없이 힘들고 슬픈 일이었다. 나는 감정에 복받쳐서 부모님께 “나를 응원해 줄 수 없다면 내가 가는 길을 조용히 마음으로 기도해 줄 수 없을까? 나도 비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면서 가고 있어.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없다면 내가 무사히 잘 피어나도록 기도를 해주면 되잖아. 내가 엄마랑 아빠의 흔들리는 마음까지 껴안으며 가기에는 내 어깨가 작아서 너무 무거운걸? 내가 잘 걸어갈 수가 없잖아.” 치병을 하는 동안 부모님을 만나고 나면 늘 내 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시구절을 소리 없이 읊으며 흐트러지고 무너지는 마음을 다시 곱게 빗고 잡아 일으켜냈다. 치병하는 동안은 부모님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지내기로 했다. 부모님께도 양해를 구했다. 나부터 구원해야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철저히 나 자신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 치병 일과를 쌓아갔다. 처음에는 이렇게 혼자 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유유자적한 산중 생활을 보내며 나를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짐을 내려놓고 꾸리는 방법도 터득했다.자연치유의 길은 암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내가 내게 내린 유배의 시간이었다. 가끔 문수산성에 올라가 경치를 굽어보며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유배를 당해 목민심서를 썼다는 것 정도 외에는 쥐뿔도 아는 게 없었지만 정약용 선생님의 그 마음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유배의 시간을 통해서 목민심서 같은 명서를 써냈듯이 나도 그 유배의 시간을 통해서 내적인 성장과 치유의 성과를 일궈내리라고 다짐을 했다. 첩첩산중에서 조난 당한 심정으로 나는 그렇게 산을 올랐지만 그렇게 매일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산의 오르락내리락의 리듬을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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