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오랜만에 북문 쪽 산장으로 향했다. 문수산의 주 등산로는 산림욕장을 통해서 올라간다.
문수산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많이 알고 있겠지만 북문의 산장길도 정말 좋다. 북문은 이처럼 주 등산코스에 비하면 비주류 코스라서 등산객들도 잘 보이지 않기에 고요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요즘은 추운 겨울이라서 그런지 등산객들이 좀처럼 다니지 않아서 산이 더 고요하다.
북문 쪽의 산장길로 입산하여 장대 2번을 찍고 문수산성으로 걸어와서 시골집이 있는 포내리 방향으로
산을 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북문 쪽 산장길은 중턱까지 완만한 오르막 길이 펼쳐진다.
잣나무 숲을 걷는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중턱에 있는 벤치까지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올라올 수 있다. 벤치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가다듬는다.
이제 여기서부터 장대 2번의 정상까지는 계속 경사가 있는 오르막 길을 올라가야 하는 일만 남았다.
여기가 문수산의 다른 어떤 코스들 보다도 경사가 급하며 꽤 높은 구간이다. 그만큼 근력 운동 효과가 좋다. 지난봄, 여름에는 4살 배기 우리 아들도 이 구간을 지나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우리 아들은 그 작은 체구로 밧줄을 잡고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잘 올라왔다. 밧줄이 있으니 키즈카페의 밧줄 타기 같은 것인 줄 알았나 보다. 올 겨울에 처음으로 북문 방향으로 왔더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급경사 길에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얼어 있었다. 미끄러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밧줄을 잡고 바위에 발을 잘 딛고 올라갔다.
"으차!" 꽤 많이 올라왔다. 겨울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가지 사이로 멋진 경치가 펼쳐졌다.
'여름에는 풀이 우거져서 보이지 않았었는데 겨울이 되니 경사를 오르면서 멋진 경치를 보는 맛이 또 색 다르네.' 나는 북한으로 흘러가는 강이 임진강인지 무슨 강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강을 따라가 보며 시선을 수평선으로 옮겼다. 천천히 경치를 즐기며 올라오다 보니 어느새 장대 2번이 보였다.
"벌써 다 왔네?"
지난 여름에는 장대 2번으로 가는 길목에 풀이 우거져서 풀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나는 그 우거진 풀들을 정원용 가위로 대충 잘라내어 걸어가는데 장애가 없도록 쳐냈었다. 김포시 공원녹지과에 매번 민원 전화를 넣고 기다릴 바에 그냥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버리는 게 나았다. 나처럼 매일 문수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에겐 길이 막히면 당장 오늘과 내일 산을 다니는 일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가끔 산을 타다 보면 호우주의보가 내린 날이나 강풍이 분 날에는 큰 나무들도 쿵! 하고 쓰러져서 길을 막아놓거나 썩은 가지가 길에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큰 나무의 가지들은 제법 굵고 커서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에 떨어지면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위험할 수 있었다. 매번 민원 전화를 넣지 않으면 산에 생기는 이런저런 상황들이 신속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문수산은 그 우월한 산림 가치에 비하여 관리가 잘 이뤄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산에는 죽은 나무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산림욕장에 있는 편백 나무들도 전정 작업을 하지 않아서 누렇게 시든 잎과 가지들이 곳곳에 보였다.
지난 1년간 산림욕장의 편백 나무들을 바라보았는데 변함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공원녹지과에 민원 전화를 넣어서 여러 차례 산림들을 신속히 관리해 주실 것을 당부드렸지만 나의 민원은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 보다 더 희미하게 들렸나 보다.
'문수산의 우월한 산림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김포에 정녕 나 밖에 없는 것인가? 흠......'
장대 2번에 올라와 벤치에 앉아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았다. '역시 장대 2에서 바라본 경치는 정말 끝내주는군!' 보온병에 든 따뜻한 물을 꺼내서 한 모금 마셨다. 산에 올라가서 산 밑에 펼쳐진 세상을 굽어보면 모든 게 다 작아 보였다. 내가 힘들다고 울고 불고 했던 모든 일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이런 초연한 마음은 어깨에 잔뜩 실린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항상 이렇게 산을 굽어보듯이 초연하게 세상의 일들을 대한다면 크고 어려울 일이 없었다.
이 구역 검은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만나는 짐승들과 구면이 생기다 보니 안 보이면 안부가 궁금해지곤 했다. 장대 2번의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쉬다가 다시 문수 산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능선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산성을 가기 전에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은 햇빛이 잘 들고 경치가 멋지다.
나는 사방이 탁 트인 이곳이 문수 산성보다 더 좋았다. 앉아 있었더니 새들이 날아왔다.
참새처럼 작은 새인데 참새는 아니었다. 새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까만 눈이 동글동글하고 둥글고 작은 가슴이 앙증맞은 새였다. 머리 부분의 새털이 떡진 것 같은 느낌의 큰 새도 날아왔다. 새들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가방에서 빵을 꺼내어 한 조각 찢어서 조각들을 근처에 던져놓았다. 그러자 새들이 차례대로 날아와서 빵 조각을 하나씩 물어갔다. 큰 새는 경계심이 많아서 멀리서 지켜보다가 결국 시도하지 못하고 나무로 날아갔고 작은 새들만 용기를 내어 물어갔다. 새들은 마치 매일 이곳에 오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저 새들은 내가 급할 때 이 산에서 용변을 본 일도 다 봤을 테지?' 새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눈 달린 생명체들이 언제 어디서 나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한참 동안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쫑쫑쫑 뛰어가는 새들의 몸짓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산 어귀에 앉아서 새들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게 세상 참 고귀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놀다가 터벅터벅 산을 내려왔다.
학창 시절에 국어 시간에 들었던 물아일체의 개념이 몸소 이해가 되고 있다.
각자 시절 인연이 있다더니만은 내 나이 서른여섯에 물아일체가 몸소 이해되다니 인생은 역시 살고 볼 일이다.
"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오늘도 신선한 물아일체의 하루를 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