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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Jan 16. 2024

위기는 늘 행운을 동반한다.

터널은 그저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했다.

일주일간 혹독한 독감의 폭풍이 몰아치고 나서 나는 다시 고요하고 평온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요일에는 남편이랑 근처의 찜질방에 갔다 왔다. 한증막이나 숯가마를 가고 싶었는데 월곶이나 강화 쪽으로 나가야 재래식 한증막과 숯가마가 있었다. 나는 주중에는 매일 문수산으로 날아다니기에 주말에는 멀리 날아다니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근거리에 있는 일반 사우나를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운양동에 있는 사우나에 갔다. 남편과 찜질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여탕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남탕으로 들어갔다. 


후딱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찜질방으로 왔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먼저 황토볼방에 들어갔다. 동글동글한 황토볼이 깔려 있어서 발이 움푹 움푹 들어갔다. 

황토볼이 따끈따끈했다. 나는 황토볼에 몸을 묻고 누웠다.

"히야...... 좋다." 피로가 스르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화덕에 들어간 밀가루 반죽처럼 나도 맛있게 부풀어질 것만 같았다. 찜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이를 낳고부터였다. 몸이 찌뿌둥하거나 피로가 쌓일 때 제일 먼저 찜질방이 생각났고 찜질방을 갔다 오면 피로를 푸는데 이만한 게 없었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 져서 황토볼 방을 나왔다. 


아직도 남편이 찜질방에 안 왔길래 전화를 해보았다. 탕에 들어갔는지 전화도 안 받는다. 

나는 밖에서 조금 쉬다가 이번에는 맨 끝에 있는 소금방에 들어갔다. 소금방은 은근한 열이 느껴지는 방이었다. 소금방에서는 한참 누워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소금방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열을 쬐었다. 

그렇게 뜨겁지도 않고 은근한 열감이 있는 곳이었는데 땀은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 

황토볼 방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남편이 아직도 찜질방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뭐야...... 왜 안 오는 거야? 탕 속에 빠졌나?' 나는 매점에 가서 감식초를 하나 시켜서 빨대를 꽂아서 감식초를 빨아먹었다. 구운 달걀에 컵라면도 하나 먹어줘야 제맛인데 치병을 하면서 라면 같은 가공 식품은 일체 다 끊었다. 

그 맛있는 라면을 끊어낸 걸 보면 나도 정말 무서운 면이 있는 것 같다. 라면을 끊는 일이 담배 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데 말이다. 주변에서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만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라면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번에는 황토방으로 들어갔다. 황토방은 3개의 방 중에서 제일 뜨거운 방이었다. 황토방에서 십 분간 앉아서 땀을 쫙 빼고 나왔다. 찜질방에 온 지 40분은 되어가는 것 같은데 아직도 남편이 탕에 있는 건지 보이질 않았다. 인포에 가서 언니에게 남탕에 방송 좀 해주실 수 없는지 여쭤보았다.

"남탕에 방송은 안 되는데요, 탕에서 목욕 중이시거나 세신 받고 계신 걸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아....... 네."

나는 다시 찜질방으로 들어가서 감식초를 마시며 열을 식히고 있었다. 다시 황토볼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제야 남편이 찜질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찜질방으로 오라고 했더니만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들어왔대?"

"탕에서 입욕하고 탕에 있는 사우나에 있었지."

"찜질을 먼저 하고 씻을 때 해야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는데? 나 참......."

남편은 탕에서 사우나를 하다 와서 지쳤는지 밖에서 좀 쉬다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결국 남편은 한참 쉬고 낮잠까지 때리고 난 뒤에 황토볼 방에 들어갔다 왔다.

'찜질을 하러 온 건지 잠을 자러 온 건지....... 낮잠 잘 거면 그냥 집에서 자지 뭐 하러 입욕비까지 내고 찜질방에서 낮잠만 자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남편은 겨우 두 번 들어갔다 나오더니 배가 고프다며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찜질방에 있는 식당에서 미역국과 돈가스를 시켰다. 찜질방에서 먹는 모든 음식들은 다 맛있다.

남편과 밥을 먹고 나니 오후 2시 반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세시에 회사 갔다 온다면서? 벌써 3시 다 되어가는데? 찜질 두 번 들락날락 하려고 온 거야?"

남편은 배가 고팠는지 반찬과 밥을 발우 공양하듯 깨끗이 다 비우고 말했다.

"탕에서 충분히 찜질 많이 했어."

"이럴 거면 그냥 나 혼자 느긋하게 있다가 가면 될 거였는데 괜히 자기 데리고 와서 나도 밥 먹고 가야겠네."

결국 시간이 부족하여 나는 찜질방을 나와서 탕으로 먼저 들어갔고 남편은 황토볼방에 한번 더 들어갔다가 나와서 씻고 나오기로 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 와야겠다.'

나는 남편이랑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 가야 할 일이 있다던 남편은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며 회사 일을 못 보겠다더니 집에서 쉬는 것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서둘러서 찜질방을 나온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질문을 침과 함께 꼴깍 삼켜냈다. 

"에휴......쉬어." 

 친정집에 갔던 아이는 저녁 7시쯤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고 꿀 같은 주말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이는 주말을 즐겁게 보내고 나면 월요병이 생겨서 아침부터 어린이집을 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썼다.

"어린이집 안가! 가기 싫어! 집에서 놀 거야!"

"주말에 우리 아들이 할머니네서 너무 재미있게 놀았구나. 오늘은 월요일이고 월요일에는 네가 좋든 싫든 변함없이 어린이집을 가야 하는 거란다. 이제 어린이집 갈 날도 얼마 안 남았어. 곧 유치원을 가면 지금의 풀잎반 친구들이 보고 싶어도 보기 힘들 거야." 아이가 어린이집을 대곶으로 다니게 되다 보니 우리 아이는 동네 친구가 없었다. 아이에게 동네 친구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미안했지만 단순하고 홀가분한 일상이 내게는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아이의 친구가 엄마의 친구가 되는 시기였다. 

아이 엄마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치병과 육아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시간과 에너지가 모자랐다. 뭐든지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나는 동네 엄마들과의 소소한 관계는 없었지만 에너지를 잘 비축하며 치병과 육아의 리듬을 잘 타며 별 일 없이 잘 지냈다. 가끔 아이의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 엄마와 만나서 키즈 카페 가는 정도로 족했다.  


아이는 한참 동안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야단이었다. '오늘도 늦었다.'

고촌에서 아이 어린이집이 있는 대곶까지는 자차로 약 30분을 달려가야 했다. 

김포가 언제부터 땅값이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고촌 인근에 규모가 있는 숲 어린이집은 없었다. 그나마 '숲'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어린이집들은 만원에 대기가 길고 경쟁이 치열했다. 아이들도 겨우 하나씩 밖에 안 낳는 저출산, 저성장 시대임에도 김포에는 아이들이 많은 건지 어린이집이 적은 건지 어린이집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처럼 치열했다. 우리 아이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아이를 좁고 답답한 가정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대곶까지 나가야지 지금의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처럼 큰 규모의 숲 어린이집이 있었다. 

어차피 나는 문수산에서 지내야 했기에 문수산을 가는 길에 대곶에 들러서 아이를 내려주고 올 계획이었다.    

아이 어린이집 원장님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왜 이렇게 멀리까지 아이를 보내는지 그 깊은 사연은 모른 채 나를 대단히 교육열이 높은 열성적인 엄마로 바라봤다. 내가 이 어린이집을 선택한 이유는 문수산을 가는 길에 있고 야간 연장 보육도 가능한 어린이집이라서 돌발 상황시에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어린이집이 집에서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아이를 맡기기에 부담스러웠다. 또 서울에 진료가 있는 날이면 그냥 어린이집을 결석하고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아무튼 이 어린이집은 넓은 실내, 실외 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어린이집이었다. 원장님도 굉장히 열정적이시고 훌륭하셨다. 거리가 먼 것 빼고는 모두 활동적인 우리 아이에게는 잘 맞는 어린이집 같았다. 원장님은 내가 처음에 상담을 받으러 왔을 때까지도 이렇게 멀리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1년을 넘게 아이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어린이집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린이집 어머님들께 고촌에서 다니는 우리 아이와 나의 이야기를 꼭 하신다고 하셨다. 원장님께서는 내게 주변에 홍보도 해달라고 하셨는데 사실 고촌에서 대곶까지 30분씩 차로 달려와서 어린이집을 보낼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나처럼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엄마가 아니고서야 딱히 힘들게 자차로 등, 하원 라이딩을 하며 보낼 엄마가 있겠느냐 말이다.


원장님의 열정으로 이 어린이집은 주말에도 바자회와 가을 운동회 같은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주말까지 장거리를 뛰며 어린이집 행사를 참여하기에는 나의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말에는 될 수 있으면 멀리 날아다니지 않고 고촌에서 지내며 뒷산 정도 산책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말이 완전한 휴식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말에는 아이가 친정 집에 가지 않는 이상 가정 보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고되었다. 

그런데 주말에도 30분을 달려서 어린이집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서 체력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내게는 너무 혹독했다. 나는 가능한 참석을 해달라고 말씀하시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선약과 가족 행사가 있다며 행사 불참을 밝혔다. 열정적인 어린이집 원장님이 너무 존경스럽지만 솔직히 주말 행사는 자제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운전을 하다가도 문득 지난 1년 4개월 동안 아이를 태우고 고촌에서 대곶과 문수산을 왔다 갔다 했다는 게 정말 놀랍고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일인데도 내가 일이 아닌 것처럼 믿기 힘들 때도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너무나 적응하며 자라준 덕에 나는 성실하게 1년을 치병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는 아이를 달래고 타일러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문수산에 갔다가 다시 어린이집에 들러서 아이를 태워서 집에 돌아오면 항상 저녁 6시 전후가 되었다.


나는 치병하느라 실질적으로 돈을 벌고 있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워킹맘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차리고 치우다 보면 오후 8시가 되었다. 아이를 씻기고 재우다가 내가 먼저 꿈나라로 떠날 때도 많았다. 이렇게 새해의 1월이 벌써 반이 지나갔다. 이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마음이 해냈다. 위기에 처한 순간에는 그것이 기회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캄캄한 터널에 혼자 있는 것처럼 시야가 좁고 어두워져서 눈앞에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내 손에 후레시가 있었고 터널은 끝이 있었다. 터널은 그저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했다. 위기는 항시 행운을 동반한다. 그때 행운의 기회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지구의 몇 안되는 잭팟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나의 미래에 또 다른 위기가 온다면 당황하지 않고 조금 더 의연하게 행운을 알아차려보련다. 

길고 끝없는 것처럼 보였던 터널을 씩씩하게 잘 지나왔다.  


지난 1년간 정이 든 시골집의 계약 만기일도 약 3주 정도 남았다. 아쉽기만 하다. 너무 보고 싶고 그리울 텐데 말이다. 주인집 할머니께서는 내게 항아리에 담가 둔 매실효소와 개복숭아 효소, 고추장은 언제든지 와서 퍼다 먹으라고 하셨다. 저 항아리들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가득 담겨 발효 중인데 나의 발길이 잘 떨어질까 싶다. 문수산은 내게 바로 달려가지 말고 천천히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가는 그리움을 품는 지혜를 알려줬다. 적당히 떨어져서 그리워하는 만큼 관계가 더욱 소중해지고 깊어졌다.       


글을 쓰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큰 산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 같다. 숨가쁘게 산 고개를 올라가며 헥헥대고 땀을 삐질 삐질 흘리다가도 고지대에 올라서 초연하게 산 아래를 굽어 내려다 보는 일이 글을 쓰는 과정과 너무 많이 닮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움을 마음에 잘 품고 표현할 수 있는 귀한 재능이다.

터널을 지나오니 뒤늦게 나의 고귀한 재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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