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명예 추장 이야기
카카오 농장을 방문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대사관은 다시 한번 특별한 자리에 초대되었다.
이번에는 티아살레(Tiassalé) 마을에서 열리는 명예 추장 추대식이었다.
초대의 배경에는 수십 년간 이곳에서 의료 봉사를 해온 안순구 박사**의 헌신이 있었다.
그는 생명을 구하고, 부족 간의 갈등을 조율하며 지역 사회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고,
여러 부족으로부터 명예 추장으로 추대되었다.
** 안순구 박사는 수십 년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료 봉사에 헌신해온 한국인 의사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많은 생명을 살리며 현지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아왔다.
이러한 헌신적 삶과 의료 철학으로 인해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우리 대사관도 그의 활동을 지원하며 티아살레와 인근 마을에 의료용품과 필수품을 제공해 왔다.
그런 인연 속에서 현지 부족장은 이번에는 우리 대사에게 명예 추장의 칭호를 주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함께 행사에 초대된 것이었다.
이른 아침, 우리는 아비장을 떠나 두 시간 정도 달려 티아살레에 도착했다.
멀리서 본 병원 건물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소박한 단층 건물이었다.
기대했던 도립 병원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병원 앞에 나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안 박사와
현지 의료진의 모습에서 따뜻한 진심이 느껴졌다.
"이 병원 외에는 치료받을 곳이 없어서, 멀리서도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의사는 절대적인 존재죠. 치료 중 환자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의사를 원망하지 않아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안 박사님의 말은 현지인들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박사는 말했다.
"아픈 아이를 등에 업고, 집에서 키우던 닭을 들고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오는 엄마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피부색이나 문화는 달라도, 모성애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걸 느낍니다."
병원 방문을 마친 후 우리는 명예 추장 추대식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더 달려 도착한 넓은 공터에는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주민들이 모여 있었고,
전통 타악기 톰톰의 리듬에 맞춰 여인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음악만 있으면 어디서든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임시 텐트에 도착하니 마을의 부족장이 원로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고 금빛 휘장을 두른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대사는 부인과 함께 맨 앞자리에 앉았다.
사회자가 등장해 참석 인사들을 소개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젬베 리듬에 맞춘 흥겨운 춤이 이어졌고,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가 차례를 가리지 않고
춤을 추며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 시간쯤 지나 무대 중앙으로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그들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치마만 두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관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들이 춤을 마치자 사회자는 이들을 대사 부부 옆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전통적으로 추장에게는 젊은 여성이 바쳐집니다.
오늘도 우리 전통에 따라 이 두 여성은 명예 추장으로 추대되는 대사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대사 부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고, 우리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회자는 곧 웃으며 덧붙였다.
"대사님께서 이미 부인이 있으니 이 두 여성은 따라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안 박사는 문화적 차이를 설명해주었다.
이슬람에서는 보통 네 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지만, 이 지역 토속신앙에는 그런 제한도 없다고 했다. 어떤 부족장은 여섯 명의 아내를 두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저도 여러 번 명예 추장으로 추대된 적이 있었어요.
한 번은 여섯 명의 젊은 여성이 신부로 헌정되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절차였지만,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죠."
그의 말에 카카오 농장 방문 당시 만났던 여섯 명의 아내를 둔 부족장이 떠올랐다.
같은 시간에 같은 지구 위를 살고 있지만, 이렇게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추대식은 전통 의상을 입은 대사에게 상징적인 의식이 진행되며 마무리되었다.
대사는 감사의 표시로 재봉틀을 선물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는 귀한 선물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다시 축제가 이어졌고,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열정적인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해가 저물고, 우리는 아비장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하나씩 켜지는 그 풍경 속에서,
낮에 보았던 티아살레의 평온한 모습과 안 박사의 헌신이 떠올랐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삶과는 달리, 티아살레 사람들은 여전히 느리고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빠름'의 세계에서 '느림'의 사람들
아프리카는 나에게 여전히 낯선 대륙이었다.
하지만 이 하루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명예 추장 추대식에서 마주한 문화적 충격,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과 공동체의 가치,
생명을 향한 헌신과 존중.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이 대륙이 가진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