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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첫아이, 그리고 무장 강도와의 만남

by 강행구

“딸이 태어난 날은 평화로웠지만, 그 일주일 뒤는 악몽 같았다.”


1998년 12월 24일, 아비장의 한 병원에서 첫 딸 예지가 세상에 나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난 아이는 조심스럽고도 귀한 선물 같았다.

태어난 몸무게는 2.4kg,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경계선에 가까웠지만,

의사도 우리도 안도하고 있었다.


한국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아이를 낳기로 한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활동한 한인 원로와 의사 안순구 박사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지난 1999년 1월 4일.

퇴근 후,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오신 장모님과 함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작은 현지 산부인과였지만 비교적 쾌적했고, 외국인들 사이에선 평판도 괜찮은 곳이었다.


병원 대기실엔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외국인 부부들이 아이 이야기를 나누며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도 곧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단 한순간,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온 세 명의 검은 그림자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병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세 명의 건장한 남성이 들어왔다.

그들의 복장은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눈빛은 날카롭고 불안정했으며, 무엇보다 손에 들린 것은 차가운 금속, 총이었다.

“움직이지 마!”

순식간에 병원 안은 공황에 빠졌다.

한 명은 접수창구로, 또 한 명은 대기실로, 마지막 한 명은 병원 안쪽 통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섰다.

그들은 분명히 무장 강도였다.

접수대로 향한 강도는 자루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현금을 여기다 넣어! 귀금속도 다 꺼내! 빨리!

그는 접수 직원의 귀걸이까지 강제로 낚아챘고, 한 여직원의 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금지된 듯한 분위기였다.

병원 전체가 침묵과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공기로 뒤덮였다.


딸을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엎드리다


대기실로 온 강도는 사람들을 위협하며 외쳤다.

지갑, 차 키, 소지품 전부 머리 위에 놔!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나는 갓 태어난 딸을 포대기에 안고 있었다.

장모님과 아내는 옆에서 숨죽이며 강도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딸이 깨어나 울기라도 한다면, 흥분한 강도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바닥에 낮췄다. 아이는 다행히 잠든 채였다.

강도는 한 사람씩 손가방과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차 열쇠를 속옷 안에 숨겼다.

아내의 손가방이 한쪽으로 내팽개쳐졌고, 곧이어 그가 내게 다가왔다.

지갑을 가져갔고, 나는 그가 차 열쇠를 발견할까 봐 숨을 죽였다.

총구 앞에서 아이를 품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몸을 누인 그 순간의 감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들키면 어떻게 될까, 총으로 맞지는 않을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은 모두 비극적이었지만,

그 어떤 생각보다 강하게 자리한 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시간이 멈춘 병원, 그리고 강도들의 퇴장


시간은 흐르지 않는 듯했다. 몇 분이었는지, 몇십 분이었는지 감각조차 사라졌다.

그러다 갑자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도들이 병원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를 꼭 안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장모님과 아내도 떨리는 손으로 몸을 일으켰고,

우린 서로를 확인하며 말없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대기실에는 널브러진 소지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갑, 손가방, 병원비로 챙긴 일부 현금이 사라졌지만, 생명은 무사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고급차는 사라졌지만, 내 아반떼는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놀랍게도 내 흰색 아반떼가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정장 차림이었기에 눈에 띄었을 법도 한데, 다행히 강도들의 목표는 더 값비싼 차량이었다.

주차장에 남은 몇 대의 차 가운데 아반떼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세 사람 모두가 말을 아꼈다.

집에 도착한 뒤, 상비약으로 보관해 두었던 청심환을 나눠 먹으며, 겨우겨우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 장면은 영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날 밤, 나는 창밖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갓 태어난 아이와 장모, 아내가 함께 있던 자리에서 무장 강도를 마주했다는 사실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위험한 땅에서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감내하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자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순간 서로를 지켜낸 우리는 더 단단해졌다.

아내의 침착함, 장모의 눈물, 그리고 내 품에 잠든 아이.

그 모든 기억은 이후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첫해, 그것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 공포와 책임, 그리고 부모가 된다는 것의 무게를
나는 그날 처음으로 진짜로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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