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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인간들

2. 박쥐여인

by 금봉


1-1



전화기 소리로 들려오는 비명과 같은 소리,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도 반가운 이때, 내게 사냥꾼의 목소리도 반가웠다.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지중해까지 들고 오리라는 것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도 나는 숨을 죽여야 했다. 사냥꾼은 법과 사람과 장소를 따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푸른 바다가 눈앞에 있음을 망각하고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꺼내 그녀를 찾았다. 나의 집착은 어느 때보다 더 강렬했으며 잔인했다.


정말 뉴스에 나온 그 여자가 그녀가 맞았던 걸까?

뱀 같은 정난희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지금 교도소에 있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나의 순수한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 그곳에 갇힌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았다.

정난희에게 연락이 왔다.

“한주?
뉴스를 찾아봐, 드디어 얼굴이 공개되었어
잘 봐, 이제 정말 정신 차릴 때야”

며칠 후, 나는 나의 엘프를 확인했다. 정난희의 말이 맞았다.

앗, 찾았다. 정말 그녀다.

나의 엘프였던 그녀의 얼굴은 몰라보게 달라졌고 붙어 있는 살을 찾아볼 수 없었고 맑고 또렷했던 눈에는 초점까지 확실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물었다.

“미성년자 피해자에게 할 말 없습니까?”

그녀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기자들을 내려보며 비웃듯 말했다.

“당신들은 그리 깨끗한가?
다들 본 듯한 얼굴인데…”

기자들은 그녀의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고 치열했던 자리다툼도 느슨해졌다. 원망과 절망과 분노를 뒤로 한 채 나는 그녀의 말에 웃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나쁜 년”

어머니가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나는 내일 돌아가
그리고 네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아니, 그러니까 조용해지면”

어머니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난희가 할 일을 내게 대신하는 것이 피곤한 모양이다.

“음, 그러니까 나는…
저기 한주야”

나는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키 큰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기,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이제 됐다는 듯, 옹색할 만큼 더 할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이 낯선 도시에 홀로 남았다.

20년 동안 철저히.



1-2



20년 후.

며칠째 깨어날 때마다 이곳이 한국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일어나자마자 찾는 푸른 바다의 색도 푸른 바다의 냄새도 나지 않는 이곳에서 지중해의 시각을 찾다니 이곳이 한국임을 자각할 때마다 덜 익은 마늘을 먹은 것처럼 입 안이 아렸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한국 땅이었지만 내가 먹은 세월은 한국을 잊길 원했던 모양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머니,라는 세 글자를 본 순간 나의 행동은 느려진다.

한국에서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좀 꺼림칙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라니 또 그러는구나?”

어머니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 여보세요,라는 말을 꺼내면 씁쓸해했다.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해 오던 방식이었고 나 또한 오랫동안 고집을 피워오던 참이다.

여보세요, 마저 어머니,라고 바꿔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저녁식사는 잊지 않았지?

아버지가 시간을 맞춰 주셨으니 꼭 참석해라

알았니?”

“알겠습니다”

정난희가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열어주지 않아도 정난희는 자신의 몸을 잘도 밀고 들어올 것이다. 인기척에도 나는 기다렸다.

오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역시 정난희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여전히 투덜거리는 정난희의 목소리는 20년 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꼭 이렇게 해야 하니?”

나는 나의 혈육보다 정난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타국의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싸움을 할 때마다 그 먼 길을 정난희는 달려왔다.

물론 어머니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

오랜만에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대하니 진짜 맡기 좋은 사람 냄새가 나는 듯했다.

“유한주 너는 참 변하질 않는구나”

정난희는 카드 키를 던지며 말을 이었다.

“미리 키를 챙겼으니”

나는 어머니를 대신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정난희는 못 본 사이 더 화장이 짙어졌고 가리고 싶었던 주름에는 주사 바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다.

“20년은 아니지만 몇 개월 만에 본 사람을
그렇게 인사도 없이 쳐다보고 있을 셈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컴퓨터로 돌아왔다.

정난희는 늘 나를 대하기 전, 두꺼운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따라 두꺼운 종이를 보니 멀미가 치밀었다.

“휴, 그냥 말로 하면 안 되나?”

“뭐 나도 그러고 싶어
헌데 대한민국에 있는 열다섯 개의 갤러리를 이 작은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
이럴 땐 설명하기 싫어하는 여사님이 아주 이해가 되지”

나는 말했다.

“정난희 씨를 보니 이제 정말 한국에 온 기분이 드는 군”

정난희는 입을 비죽거렸다.

“칫.”

정난희가 다가와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부터 한주가 할 일이 많아질 거야
아주 바빠질 거란 얘기지, 지금부터 차곡차곡 네 거로 만들어야지?”

정난희는 내가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아버지 회사의 비밀스러운 일은 물론,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내가 자랄수록 정난희는 꼭 그 말을 했다.

네 것으로 만들어 가야지?

이 여자는 마치 자기의 목표라도 되는 냥, 주문처럼 내게 세뇌를 시켰다.

“참, 니스에서 한주 작품 때문에 떠들썩했다 던데?
이제 시작이 맞는 거지?”

정난희는 대체 내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어머니와 정난희의 대화법은 특이했다.

내가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말속, 단어 하나라도 들으려 애를 써도 모기 날개 짓 만한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도 비열하게 나를 통하여.

“자, 설명 끝났으면 이제 안녕합시다
저녁에 또 볼 텐데, 내가 돌겠거든?”

정난희가 난색을 표했다.

“평생 내가 할 말일 거 같은데?
유한주 씨?”

정난희는 빠르게 키를 챙기며 방을 나가며 덧붙였다.

“참, 두 시에 옷이 올 거야, 꼭 입고 참석해
20년이나 지났는데 더 이상 사냥감은 되지 말아야지?”

찰칵, 하고 문이 닫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눈두덩이를 움찔거리며 그곳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정말이지 목을 비틀어 주고 싶은 늙은 여우 정난희다.

어차피 난 이제 한국생활에 다시 적응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그 모든 것들을 시작할 것이다.

20년 만에 찾은 나의 집, 아니 아버지의 집, 어릴 적 집 앞에 설 때마다 느낀 위압감은 이제 사라졌다. 아버지가 말하는 병신새끼가 저지른 인터넷 범죄가 마감이 되었던 그날, 그 위압감은 사라졌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일을 그렇게 불렀다.

병신새끼가 저지른 인터넷 범죄.

나는 한편으로 그렇게 말해주는 아버지의 화법이 좋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미성년자 피해자,라고 나를 설명했지만 그들은 그 작은 피해자를 썩은 시궁창에서 바로 건져 올린 것처럼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의 뇌 속에는 나를 진저리 치고 있었지만 보이는 감정으로 나를 피해자라 말하며 동정했다.

그 가식의 감정이야 말로 썩은 시궁창 냄새가 났다.

아, 정난희다.

하필 저렇게 문 앞까지 나와있다니, 집 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저 늙은 여우를 만나다니 정신이 번쩍, 스릴이 넘친다. 정난희 주변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늘 뻗쳐 있다.

나는 아마 그걸 즐기는 모양이다.

정난희는 이제 나를 유한주 씨라 부른다. 여간 멀미가 나는 게 아니다. 씨, 라니 이번에는 정난희의 목 뒷덜미를 잡아채고 싶은 심정이다.

“한주 씨 왔어요?
아버지가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정난희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와이셔츠 옷깃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오늘만은 집안이 조용하길 바란다, 이것은 어머니의 말씀.”

홍기사가 목례를 했다.

나는 홍기사 옆을 지나며 말했다.

“안 됐군”

나는 분명 들었다. 홍기사의 피식, 하는 소리를.

처음 보는 젊은 여자와 정난희와 여우 냄새가 정난희와 맞먹는 늙은 여자가 나를 반겼다.

아, 이런 식사를 하기도 전에 아린 마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누나가 차례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어머니는 늘 그렇듯 날 안고 붉은 입술로 내게 입맞춤했다.

“우리 잘 생긴 아들, 어서 와라”

나는 사실 어머니를 18년 만에 처음 본다. 그 세월을 건너뛴 서른여섯의 아들을 보고도 나의 어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물론 늘 나를 접한 정난희를 통해 나의 소식과 사진을 스토커처럼 줄줄 외고 있었지만 이 모습은 정말 대단한 강심장이 아닐 수 없다.

그와는 다르게 나의 심장은 흥분 속에 갇혀 쿵쿵, 거리고 있었다. 나는 깊고 깊은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유한주 오랜만이다?”

누나 은수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 주변인들 중 가장 한국 냄새가 나지 않았고 순수한 사람이다. 어떻게 아버지의 씨를 받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탄생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은수는 순수했고 사람 냄새가 났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어머니가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놀라 은수를 흘겼다.

사실 은수는 애인과의 이별 여행이라며 나를 찾아왔다. 물론 그것은 비밀이었고 나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내게 애원하지 않아도 그것을 발설할 생각도 없었다.

왜냐면 관심이 없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런 이제 와서 내가 비밀을 발설한 셈이다.

은수의 얼굴이 발개지며 나를 응시했다.

식사를 하느라 나를 보지 않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초록색 잎을 국수 먹듯 후루룩, 거렸다.

아, 다시 마늘 냄새가 올라왔다.

아버지가 사냥을 할 때면 늘 취기가 대단했을 때를 말한다. 어디선가 마늘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내게 그것을 뿜어냈다. 아버지의 사냥 보다도 난 그 냄새를 무서워했다.

차라리 질식해서 죽어버렸으면 하는 날 들이 더 많았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그 냄새는 나의 뇌 속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앉아라, 고생 많았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보지 않는 틈을 타 아주 자세하게 그를 훑었다.

그는 이제 완벽한 백발이다. 20년 전에는 그의 머리카락은 흰색과 검은색이 공평하게 편을 가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나에게, 또는 그들에게 가려진 20년은 백발을 만들었고 유한주를 만들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가 말했다.

“소식은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유명해지려 하지 마
아주 골치 아픈 일로 엮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네 그림 모두 한국으로 가져올 생각 말고 청담에 있는 갤러리에 두 점만 걸어 놔
널 모르는 작자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말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등을 쓸며 말했다.

“당신, 그래도 한주 작품은 봐야 죠
그쪽에서는 정말 좋은 값에 나간 작품도 있고, 예술 잡지에도 여러 번 실렸다고요
작품을 가져온다고 해서 엮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굉장히 큰 발전이라고 생각할…”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휙, 뿌리치며 소리쳤다.

“시끄럽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화자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거요?
그 그림 팔아서 뭐 하게?”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지만, 한주는 정말이지 잘 컸어요
내가 없이도, 아주 잘…”

결국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렸다.

정난희가 뒤에서 아주 빠르게 손수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나는 긴장이 되었다.

은수가 샴페인 한 병을 거의 다 마신 듯 보인다. 나머지 한 잔을 비우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하,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유일하게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 수 있는 사람은 은수였다. 은수는 나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자신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통이 다시 또 시작될까 얼른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언제 눈물 흘릴 일이 있었냐는 듯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의 감정 전환법은 20년 전 보다 더 혹독했고 소름 돋았다. 아주 완벽한 감정 전환이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어머니를 따라 구석진 방으로 향했다.

왜 하필, 이 방을 새로 꾸며 내게 내미는 걸까?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20년 동안 와 보지 못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과 감정은 이 복도를 이 냄새를 기억했고 나의 뇌는 그때로 돌아가 긴장을 하라고 애원했다.

어머니가 복도에 길게 배치해 둔 화분을 보며 말했다.

“워낙, 깊은 곳이라 공기 순환이 늘 문제였지
이번에는 공기 순환기도 달았어
그리고 이 많은 화분들이 내뿜는 에너지 덕에 여긴 아주 숨쉬기가 좋아졌어”

어머니는 미리 내가 손을 들고 불만을 말할 기회를 앗아갔다.

나는 말했다.

“전, 오랫동안 있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는 나의 말을 들었지만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방 문을 열어젖히며 꿈에 부푼 소녀처럼 말했다.

“이곳 좀 봐
정말 대단하지 않니? 난희가 신경을 쓰긴 했지만 이 정도로 나올 줄을 몰랐어
침실로 한 번 들어가 보렴, 대단해 아주 대단해”

어머니는 창문을 열며 다시 말했다.

“이곳에서 신혼을 보내면 좋을 거야”

나는 대답할 말을 차마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카펫의 촉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좀 쉬겠습니다”

내내 나를 등지고 있던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나의 얼굴을 감싸며 상처 난 눈두덩이를 쓰다듬었다.

“내겐 아직도 열다섯 살 같은데…
참, 쓴 세월이야
한주야”

나는 어머니의 눈을 마주했다.

“말씀하세요”

“고맙다”

그때 정난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사모님, 찾으십니다”

나는 어머니가 사라지고 나서야 편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

짐 가방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앞치마를 맨 젊은 여자는 나처럼 허둥거렸다. 나는 짐 가방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젊은 여자를 지켜보았다. 신기할 만큼 주변을 인식하지 않는 모양새다.

나를 흘깃, 하는 정도의 모양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몇 살입니까?”

젊은 여자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주문을 외운 듯 답했다.

“죄송합니다 사적인 이야기는 금지로 되어 있습니다”

“헛 푸핫”

정난희의 짓일 거다. 나는 뿜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참았던 실소를 터트렸다. 젊은 여자는 공포에 질리기라도 한 듯,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기, 오늘은 됐고 내일 해요
쉬어야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1-3



본격적으로 나의 한국생활은 시작되었다.

나의 달라진 얼굴과 체격 머리카락, 말투, 당연히 사람들은 그때의 소년이 나,라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잘 안다.

20년 만에 온 이곳이 낯설다,라는 생각과는 달리 나를 모르는 그들, 그리고 그들을 아는 나는 더 당당해졌다.

정난희는 어머니의 곁에 있는 시간보다 내 곁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듯했다. 나의 의견은 늘 그랬듯 필요치 않았고 어머니는 정난희를 내 곁에 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렇게 하루를 또 마감했다.

나는 그것을 딱히 불만족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누군가는 돈으로 실력을 평가받았다,라는 이야기를 내놓긴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고 이것으로 평가받는 것 또한 즐겼다.

그림을 시작한 것은 어머니의 권유다. 사실 어머니는 유명한 미대를 나왔고 작가로서 생을 살고 싶어 했으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창작은 너를 낳고 끝이 났지
넌 나의 마지막 창작물이란다”

타국에서 강요 또는 불친절한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나의 유전자에는 어머니의 것들이 많이 첨가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를 창작의 세계로 인도해 줄 선생은 한 달 만에 자리를 박탈당했고 강요로 멈추어 있던 나의 창작은 그때부터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을 그렸다. 대중이 보는 성별은 모호했으나 내 눈이 말하는 성별은 늘 정확히 여자였다. 닮은 듯 아주 달랐지만 그 여자는 그녀다.

나의 그림을 처음 선택한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여자에 가까운데…
아, 자세히 보니 박쥐를 닮았네요?
맞습니까?
정말이지 볼수록 꽤, 공포스럽군요”

그 사람은 등을 말아 쥐며 고개까지 흔들어 놓고, 나의 첫 박쥐인간을 잘도 들고 갔다. 그렇게 나는 꽤 혐오스럽거나 공포스러운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 작은 도시에서는 아직 생성되지도 않은 그림을 예약이라도 할 듯, 문의가 쇄도했다.

희한한 건 그 도시 사람들은 흉측한 것을 즐기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뜻대로 나는 비행 청소년 즘 되는 이상한 피해자나 사회 속에 속할 수 없는 사람에서 완벽하게 인생을 탈바꿈한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내가 갤러리에서 딱히 할 일은 없다.

가끔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의 얼굴을 보여 주거나, 나의 몇 점 없는 작품을 설명하거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거나 또는 정난희와 말씨름을 하는 것뿐이다.

반복되는 이 일들은 굉장히 단순했지만 소모적이다.

정난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작업실로 들어왔다. 분명한 건 지금, 나는 또 소모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난희가 서류를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

“하, 한주 씨가 말한 거
아니, 대체 왜 찾아야 하는 거야?
복수라도 할 셈이야?
만약 사모님이나 회장님이 아시면 이번에는 니스가 아니라 지옥일 거야”

나는 빠르게 책상 위 서류를 뒤적였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예상대로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출소했다는 소식은 몇 년 전 뉴스로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던 터라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아버지의 비밀노트 따위는 필요 없이 당당하게 키보드 판을 눌러가며 돈을 지불해 가며 그 세상을 오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그녀를 찾았다.

그 무지막지한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정난희는 자꾸만 왜,라고 묻는다.

왜,라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무조건 그녀를 찾아야 했다.

정난희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내 귀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다 큰소리로 발설했다. 그만 그만 그만.

“닥치라고”

이런, 그만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위해 치아를 열었지만 나의 혀는 닥치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뱉고 당황했지만 약간의 희열감을 느꼈다. 특히 어쩔 줄 몰라 몹쓸 표정을 짓는 정난희를 보자 나는 굉장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 이런 거였어?
정난희 너 이런 거 무서워하는구나?’

나는 속으로 하악, 하며 웃어 댔다.

정지된 모양의 정난희가 솟았던 어깨를 내리고 말했다.

“말, 말은 골라해야지?
내가 너 밑 사람은 아니잖아?
살 궁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주는 사람이
네 부모도 아니고 나란 거 잊었니?”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성질을 한 풀 꺾어 정난희에게 두 손을 모으며 사과의 표시를 했다.

“미안합니다, 이것 때문에 좀 날카로워져서”

정난희가 다시 말했다.

“그 여자 시골에 있어 그것도 아주 시골
작은 동네 슈퍼를 한데 거기서 먹고 자고…
술 팔고 웃음 팔았다가 동네에서 머리 몇 번 잡히고
떴다는 얘기가 마지막 소식이야”

“하, 끔찍하게 살고 있군”

정난희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내 앞에 앉아 정면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자, 내가 줬으니 너도 줘야지?
왜지? 이유를 말해 줘야지?”

정난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충동이 일었다. 마음속에 있는 정난희에 대한 말을 나는 아주 솔직하게 털었다.

“죽이고 싶어서”

정난희는 이번만은 놀라지 않은 눈치다.

아, 소리를 질렀어야 이 여자가 놀랐을까?

“하, 이럴 줄 알았어
유한주, 그 여자 안 그래도 이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아
어쩌면 살고 있는 지금이 지옥일 거야”

나는 속으로 읊었다.

‘지옥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하하, 아니 정난희 씨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데도
놀라지 않네요?”

정난희가 맥주 캔을 열었다.

“내가? 놀랄 일이 아니지
내가 한주라도 죽이고 싶었을 거야
한주의 한 시절을 뺏어갔잖아?”

정난희는 맥주를 순식간에 모두 들이켰다. 그리고 뭔가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서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져갈 거야
혹시라도 회장님 눈에 띄면 한주 씨는 끽
그리고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안 해 알았니?
유한주?”

나는 책상에 두 다리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정난희가 나가려는 듯, 잠시 멈추며 말했다.

“참, 죽이려면 미리 알려줘
그래야 수습도 쉬우니까
간다”

나는 조용히 피식거리며 말했다.

“후훗, 맙소사”

이때부터다.

나는 정난희에게 점점 눈이 멈추기 시작했고, 정난희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별이 정확한 박쥐여인이다. 그리고 이전의 박쥐인간과 해석이 다르다.

정난희는 내가 작업을 할 동안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작업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쓸데없는 일로 또는 엘프의 일을 핑계 삼아 정난희를 불렀다.

정난희는 엘프 보다 박쥐의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살짝 들린 콧등은 그야말로 박쥐 같았고 시도 때도 없이 말을 만들어 내는 치아도 그야말로 박쥐 같았다.

그리고 쭉, 찢어진 두 눈 속에는 엘프의 박쥐가 들어있었다.

나는 일주일 만에 박쥐여인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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