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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인간들

3. 냄새

by 금봉



1-1



이틀째 허탕이다.


그녀를 찾기 위해 이름도 생소한 곳에서 머무는 중이다. 동네 슈퍼라고 말하기도 어색한 이 구멍가게는 정말이지 공포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소다. 굉장한 흥미가 일어나는 중이다.


사막 위에 집 한 채 있는 듯한 이 그림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나에겐.


그늘 막 하나 없이 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슈퍼 앞 들마루의 역할은 휴식처가 아닌 고된 곳에 불구하다. 다시 한번 얇은 유리 미닫이 문을 밀어 보았다.

역시 어제처럼 굳게 잠겨 있다.


슈퍼 안은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가 분명했고, 얼마 안 된 것도 분명해 보였다.

먹다 남은 소주병, 그리고 소주잔, 날파리가 아직 꼬이지 않은 채 덩그러니 쉰 내를 풀풀 풍기고 있을 옥수수, 그리고 붉은색 슬리퍼, 분명 그녀가 머물던 자국이다.

이 얇은 유리문은 쉽게 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 놓은 규칙에 어긋났다.


머물기를 포기한 후 나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일그러진 태양이 노을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이지 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렬했고 이글거렸다.


앗, 이럴 수가, 그때 긴 곱슬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치 아주 먼 거리를 슬리퍼 하나에 의지 한 체, 흔들거리며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아스팔트 위 아지랑이가 그녀의 모습을 희미한 형체로 만들었다.

그녀일까?


나는 상체를 차 밑으로 깊숙이 집어넣으며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목덜미만 뚫어지게 보았다. 그때의 그 몽환적인 하트 모양의 점이 꼭 있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년, 범죄자, 가해자 그녀일 것이다.


슈퍼 앞 생뚱맞은 차를 모른 척,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예상 밖에 그녀는 주위의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눈치다.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마신, 깜박 잊은 음료수 캔이 들마루에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아주 멀리 집어던졌다.


그녀는 열쇠가 아닌 몇 번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슈퍼 미닫이 문을 열었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철이 맞닿는 소리가 시원했다.

나는 그녀가 슈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시동을 걸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했고 호흡도 내 맘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그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떠올리면 늘 생각나던 나의 첫 절정을, 나는 오랫동안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20년 동안 그곳의 생활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그 기분을 맛보지 못했다.


그 어떤 나쁜 년과 잠에 들어도 맛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좌절했다.


열다섯 살의 해.


내게 초등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친구, 최우석, 그가 늘 곁에 있었다.

성격이 비슷했고 워낙 우리는 서로 말없이 눈으로도 통했던 사이였다. 우석이는 원하지 않든 원했든 그 사건이 일어난 후, 나를 만나 주질 않았다.


어쨌든 나는 학교를 가야 했으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언가를 설명하는 선생도 늘 마주쳐야만 했다. 어쩌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선생은 유령이라도 본 듯, 이를 악물고 치를 떨었다.


아주 뒤늦게 정난희에게 들은 사실은 우석이의 아버지는 꽤 유명한 언론의 보스였고 나의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곳이라 했다. 그로 인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연히 그들과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고 나와 우석이의 우정은 그들 앞에서 처절하게 찢겨 나갔다.


그때 처음 본 우석이의 아버지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다. 우석이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아버지를 보며 멧돼지를 상상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경멸의 눈빛을 지는 멧돼지를 20년이 지난 후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그들과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병신 새끼가 저지른 인터넷 범죄라고 새하얀 구둣발로 나를 찍어 눌렀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첫 보도를 한 곳에서 나를 완벽한 피해자로 만들어 갔고 눈으로는 나를 경멸한다,라고 말하고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동정심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한국을 막 떠나기 직전 우석이는 아주 당당하게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우석이를 보자마자 그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고개를 도리질했지만 고집이 남달랐던 우석이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짧은 시간의 만남을 약속한 후, 커다란 짐 가방이 널브러진 나의 방으로 우석이가 들어왔다.

우석이가 머뭇거리다 방언처럼 터져 나올 듯한 말과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잘… 다녀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래 걸릴 거야 정난희 말로는 그래”

“그렇겠지…
당연히 너도 잊히기 바라는 거지?”

“글쎄”

글쎄,라는 나의 대답에 우석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난 관심 없어”

나는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수목이는?”

수목이는 우석이의 친구였지만 나와도 약간의 빗나간 우정을 쌓아가던 친구다.

“응, 뭐”

“그 말은 소식 없다는 얘기지?”

우석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네 걱정은 모두가 해.”

“쳇, 그 걱정은 경멸이겠지”

“그래도 나는 널 응원할 거야
알잖아?
내가 죽고 싶다는 얘기를 했을 때 넌 날 응원했잖아”

나는 우석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친구”

우린 마치 어른이라도 된 것 마냥 멋들어지게 마지막 악수를 했다. 그리고 우석이는 그 살아있는 장애물을 지나 먼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런, 몇 초였을까?

정신을 놓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핏물의 노을을 따라 무작정 가고 있었다.

“정말 사막 같군”

핏물 노을이 사라질 때 즘, 나는 다시 돌고 돌아 슈퍼로 돌아왔다. 반가운 불빛이 유리 사이로 번지고 있었고 좁은 곳을 정리하는 듯한 그녀의 붉은 슬리퍼가 왔다 갔다를 했다.

아, 나는 왜?

정난희의 물음이 생각났다.

이유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마주했을 때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집집마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인기척이 없는 곳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듬성듬성 박힌 가로등이 차례대로 켜졌다. 얼마나 고요한지 가로등에서 뿜어 내는 전기 소리까지 들린다. 그때 슈퍼의 미닫이 문이 열렸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워낙 고요한 이 마을에서는 나의 기척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차 유리문을 살폈다. 그녀는 긴 곱슬머리를 틀어 올렸고,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붉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끈적한 들마루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는 그곳에 힘 없이 앉았다.

그리고 먼 곳을 응시했다.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두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두 다리는 긴 원피스에 가렸지만 벌어진 상태다. 정난희의 말처럼 그녀는 정상이 아닌 듯해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아주 오랫동안 내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검게 치장된 차 안 속이 보일 리는 없다.

나는 더 자신 있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내가 있는 곳을 자신 있게 바라보았다.


아, 불청객인가?

마을 위 쪽에서 누군가가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발소리가 급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발소리의 주인이 그녀 앞에 다다랐다. 키가 크고 깡 마른 남자, 팔과 다리는 시커먼 문신으로 가득했고,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귓가에 쩌렁쩌렁했다.


남자는 그녀를 협박하듯 말하고 있었다.

“알아봤어?”

그녀는 침묵했고 도리질했다.

남자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 새끼 이름까지 바꿨어 알고 있었지?
존나, 유명인이 되었던데?
그거 지금 팔면 어마어마한 돈방석에 앉는 거야
꾸물거릴 필요가 없단 말이야
우린 시키는 대로 돈 만 받고 여길 뜨면 되는 거야 응?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왜? 왜 눈알만 굴리고 말을 안 해?”

그녀가 읊조렸다.

“난 그냥 빼”

“뭐?”

“난, 밥 먹기도 귀찮은 사람이야”

“야 이 썅년아,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젠장, 나는 실수로 클랙슨을 누르고 말았다.

그 짧은 찰나 나는 수많은 생각을 해야 했고, 결론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남자는 나의 차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그 속도까지 나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남자는 소리를 치며 온몸을 흔들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 쉬지 않고 서울까지 액셀을 밟았다.

아마도 다시는 이 차로 그곳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며칠 동안의 수고가 허투루 돌아왔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연필을 들었다. 다시 생생하게 본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생생함을 잃어버리기 전에 마쳐야 한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자꾸만 손가락을 괴롭혔다.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린 돈만 받고 여길 뜨면 되는 거야”



1-2



한국에서 나의 첫 작품을 발표하는 날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박쥐여인 두 점을 완성했고 성별이 없는 박쥐인 한 점을 완성했다. 붓을 들기 전 생각과는 다르게 붓이 이어가는 선을 그려 낼 때마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난희가 말했다.

“대체 뭘 생각하고 그린 거지?”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생각은 붓을 잡자마자 멈췄지”

정난희가 한쪽 눈썹만 치켜올리며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훑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붓을 잡기 전에는 무슨 생각을 했지?
작품에 대한 설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갑자기 재밌어지는 이 상황에 의자를 끌어 정난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당연히 훅, 다가온 나의 얼굴을 보며 정난희는 치를 떨며 말했다.

“깜짝이야,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이 상황이 웃겼다.

“하하하하하하
이것, 이걸 상상했지
박쥐가 웃는 거 봤어요?”

정난희가 난색을 하며 박쥐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사악해”

정난희가 한참을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봐야겠어
나도 꽤 호기심이 가거든”

그때 나는 박쥐여인이 정난희의 계획에 따라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굴었다.


박쥐여인은 그렇게 한국에서 발표한 첫 작품이 되었고, 18년 동안 보지 않았던 아들을 아주 잘 알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는 그림에 대해 호평했다.


한국에서 유한주라는 이름을 처음 알리게 된 것이다.

대중들은 신기하리만큼 악마적이고 소름 돋는 장면에 어깨를 올리며 고개를 도리질하며 눈을 가리다가, 또는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서로가 모르는 순간에 그것들을 은밀하게 다시 확인하며 어떤 만족감을 느낀다.


나의 박쥐 시리즈가 그랬다. 보지 않는 듯, 눈을 가리며 눈은 커다랗게 뜨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 안에 넣어 만족하려는 사람들이 나의 눈에는 보였다.

그것이 바로 이들, 박쥐인간들이다.


처음 세상 밖에 내놓자 쏟아지는 혹평들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는커녕,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그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큰 쾌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뒤집힌 호평으로 승리감까지 맛보았다.


나를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나를 20년 만에 치켜올리기 시작한 기이한 일이 된 것이다.

정난희는 마치 자신이 진짜 박쥐여인의 주인공인 것 마냥 전시 내내 자주 빛 메이크업과 슈트를 차려입었다. 내 옆을 지키며 정난희가 보내는 사악한 웃음이 그들에게 호평의 평가를 끌어 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나의 어머니는 말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성과를 얻은 박쥐 시리즈는 당연히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 지독한 마늘 냄새를 맡으며 나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열다섯 나이에 느꼈던 두려움과는 아주 다른 것이어서 나의 내면의 사악함이 하마터면 진정한 사악함을 드러낼 뻔한 것이다.

전시회가 끝나고 난 후, 나는 두문분출할 수밖에 없었다.

순환이 잘 되는 구석진 방, 식물이 내뿜는 너무 많은 피톤치드 공허할 정도로 넓게 뻗어 있는 복도, 나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스스로 갇혀 있는 중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를 옥죄는 아버지의 마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 보이지 않는 쇳덩이가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머니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을 얻기로 했었다. 물론 그 일은 정난희가 일을 마쳐 주기로 되어 있었다. 완벽한 독립을 한 달을 앞두고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세상에, 내가 특집으로 나올 법한 인물이었던가?

헤드라인을 장식, 박쥐여인의 작가 유한주, 그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다시 유한주가 아닌 유인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사건은 오늘 일어난 사건처럼 또 다른 시작이 되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피해자가 20년 동안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 또는 아직 트라우마에서 나올 수 없었던 작가의 작품에는 그 사건이 담겨있다?


내가 유인의 형제가 아닌, 유인이라는 것을 그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박쥐여인의 목덜미 점을 읽어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나는 나의 엘프였던 그녀의 하트 모양 점을 목덜미의 그림자처럼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한데 그 그림자마저 하트 모양의 점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악몽은 또다시 시작된다.

유한주, 유인에 대한 기사를 막기 위해 정난희는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전시회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던 그녀다.

다시 또 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점점 더 푸석해져 갔고 눈 밑의 검은 그림자는 입을 갉아먹을 것처럼 덤비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딱 한 번의 힘으로 텔레비전을 망가뜨렸다.

그때도 역시 마늘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내가 소장하고 있던 박쥐여인의 목덜미를 새 하얀 구두로 짓이기고 또 짓이겼다. 목덜미에 구멍이 나기 시작할 때 나는 아버지의 앞을 막아섰다.

바위 만한 주먹으로 아버지는 나의 어깨를 밀쳤다. 나는 열다섯 유인이 아니었고, 꿈쩍하지 않으려 버텼다. 아버지의 폭행보다 두려운 건 지독한 마늘 냄새다.

“개자식
넌 어릴 때부터 소름 끼치는 개자식이었어”

아버지는 또다시 나를 그렇게 불렀다. 개자식

“다시 돌아가”

20년 전 보다 훨씬 커지고 우악스럽기까지 한 나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눈치챘다.

나의 주먹을 바라보며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니 까짓 게 감히
왜? 그때처럼 칼이라도 휘두르지 그래?”

내가 여덟 살 무렵, 나는 그때도 아버지에게 맞고 있었고, 어떤 용기로 나의 손이 칼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칼을 들었고 아버지를 협박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는 때마다 그 사건을 들먹거렸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그때를 말하며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의 정적을 뚫고 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아빠, 아빠 앞에 있는 사람은 열다섯 살 꼬마가 아니에요
제발 좀 그만하세요
이젠 이걸 보는 나도 지쳐”

아버지의 눈은 빠르게 다른 사람의 것, 그러니까 보통 사람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나는 그런 징그러운 모습으로 빠르게 변하는 아버지가 혐오스러웠다.


아버지는 유은수 앞에서는 진짜 아버지가 된다.

은수가 소리친다.

“지아야 지아”

젊은 여자가 대답했다.

“네, 가요”

“여기 좀, 부탁해”

젊은 여자 지아가 커다란 텔레비전이 조각 나 있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은수가 나직이 말했다.

“구경 났어? 얼른”

“네네”

아버지는 그렇게 마늘 냄새를 남기고 긴 복도를 뚜벅뚜벅 걸으며 천천히 소리쳤다.

“돌아, 가”

나는 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내 마음대로 하겠어요”

은수는 싫다는 손짓도 불구하고 나를 억지로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미지의 성과 같아서 내가 걸음 하기 힘든 곳으로 내가 막 걷기 시작할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보았던 곳이다.

나는 늘 그곳을 은수에게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은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는 내가 은수와 친밀감을 갖고 지내는 것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은수의 방은 아버지의 서재 옆에 위치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곳을 미지의 성이라 불렀다.


은수가 검은 핏빛과 닮은 와인을 따라내며 말했다.

“맞서지 마”

나는 웃었다.

“맞서지 말라니??
그래 본 적이 없는데…”

“예전처럼…
하, 아니다”

“아, 이런…
그건 본능이었어, 살아야 하니까”

내 기억 속 미지의 성은 변하지 않았다.

변했다면 술잔과 술병이 있다는 것, 그리고 침대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지의 성 또한 어머니의 강요가 느껴지는 나무들이 즐비했다.

“자 마셔”

“완벽한 약이군”

은수는 다시 와인을 따라냈다. 그리고 잔을 통해 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 보았다. 나는 물음도 하지 않고 유리잔으로 보이는 은수의 얼굴을 함께 들여 보았다.

한참 후, 은수가 말했다.

“너 정말이야?

나는 은수의 주어 없는 물음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은수 앞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응, 정말이야”

은수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그 반응은 나도 그럴 줄 알았어,라는 대답이라 생각했다.

은수는 내가 열다섯, 그 사건이 세상에 밝혀졌을 때 한국에 없었다.

아버지의 치밀한 계획으로 내가 한국에서 떠날 때 즘, 은수는 되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년 동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다시 미지의 성을 지키고 살았던 것이다.


아마도 은수가 그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지는 않았을 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린 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와인을 홀짝거렸다.

그때 우당탕탕, 복도에서 복잡한 소리가 들렸다.

예상과 들어맞는 정난희의 거친 난입이다.

“지아 지아야
사모님 어디 계셔?”

당연히 어머니의 방 또한 은수 옆 방에 위치했다.

나는 오늘 2층에서 많은 것을 본다. 아마도 어머니의 방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은수가 말했다.

“하, 또 무슨 일이야?”

나는 와인잔을 들고 빠르게 걸음 하는 은수의 뒤를 천천히 주위를 탐색하며 걸어 나갔다.

어머니는 기도 중독에 걸려있는 사람이다.

지독히도 답을 말하지 않는 예수를 짝사랑하는 사람이다. 정난희는 예수와의 데이트를 방해하며 노크도 없이 어머니에게 돌진하며 쉴 새 없이 말했다.

“최광식이 그 사건을 또 터트렸어요
이번에는 모두 지워버렸던 동영상까지…
이미 언론마다 다 뿌려진 상태이고
예전처럼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십자가가 달려있는 벽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후, 그래서?
결론은 한주에게 불리하다는 거야?
아님?”

정난희가 뭔가 놓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

“결론 내지도 않고 지금 나를 방해하는 거야?
정실장?”

정난희가 그렇게 난처해하는 얼굴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나는 나의 비웃음을 들킬까, 와인을 들이마셨다.

“그게, 양날이에요”

은수가 말했다.

“알아듣게 말해요”

그 사건의 주인공의 나는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그들을 지켜보았다.

“동영상은 이미 다 퍼진 상태라
한주에게 불리해요
당연히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아닌 억측들이 박쥐여인을 통해서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예를 들자면?”

“박쥐여인을 혹평했던 아무개들이
악마가 악마의 손을 잡았다,라는 식의 기사를…”

어머니는 정난희의 말을 잘랐다.

“정실장, 그 기사는 당연히 그곳이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지?
그 기사부터 막아요
그 사람에겐 내가 연락하겠어”

“네 알겠습니다”

정난희는 나의 눈이 아닌 나의 눈썹 상처를 흘겨보며 서둘러 나갔다.


은수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미지의 성으로 들어갔다. 20년 만에 들어온 또 다른 미지의 성, 어머니의 방 소파에 앉았다.


나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무어라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그냥 한숨을 내쉴까?

한참을 생각하던 중 어머니가 말했다.

“걱정 마 해결 못 할 일은 없어”

이럴 때는 그렇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들었다.

“나가 봐, 아직 기도를 마치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나가며 어머니의 방 전체를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구석진 나의 방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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