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떠난 그
시간은 거짓말처럼 잘도 흘러갔다.
아키라의 장례식 이후
사라질 것만 같았던 코하네는
거짓말처럼 하즈키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눈을 감는 시간마저
아까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코하네에 대한
갈증이 커질수록
자신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더 정확한 사실은
마호와 코하네의 틈에
들어가는 게 자신 없었다.
마호가 왜 하즈키에게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마호는 그녀를
사랑 이상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욕심이 없는 사랑이란
감정이 과연 존재라도 할까,
라는 생각만 수백 번,
수만 번 의심해 보았다.
후미코, 츠키노, 코하네의
죽은 가족들을
눈으로 확인했던 그날,
하즈키는 많이 마시지도 않았던
술에 정신을 잃었고,
바닥에 세게 부딪힌 바람에
그의 어깨는 아직도
불편하게 삐걱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마호가 걱정되는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습니까?
하루가 지나도록 깨지 않았어요.”
믿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두어 시간이 흐른 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던 건
희미한 달빛이었다.
마호가 말했다.
“하루 꼬박 단 한 번도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 않더니,
방금 잠이 들었습니다,
꼬박 삼 일을
눈을 감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지.”
마호는 작정한 듯,
말을 이어갔다.
“난 이제 혹시, 하는
의심 아니 기대도
모두 잃어버렸으니… "
하즈키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것 또한 꿈인지
혼자 횡설수설이었다.
마호는 바쁘게 왔다 갔다
무언가를 치우고 닦아내더니
자기의 커다란 가방 안에서
작은 가방 하나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코하네 것.”
하즈키는 마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난 먼저 갑니다
꼭, 내가 먼저 연락하겠다고,
전해줘요 또한 난
괜찮다고 전해 주십시오.”
마호는 아키라에게
또는 그들에게
두 손 모아 깊게
인사를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하즈키는 그날 이후
마호를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코하네가 전해 준 소식은
문두스를 저렴한 가격에 인수했고,
바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소식 또한
코하네도 리리카에게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코하네는 마호의 말 그대로,
연락을 기다리기만 했고
마호의 괜찮다는 말에,
걱정도 재촉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리리카는 문두스를
마호가 인수했다면
당연히 코하네가
안 주인 행세를 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코하네가 문두스를 나온
이후로 연락 없던 리리카는
선수라도 치듯
코하네에게 연락했고
그때 마호의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코하네는 시간이 날 때마다
또는 마호가 집에 머물 시간이
될 때마다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마호의 얼굴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닌 척, 하는
코하네의 얼굴은 오늘도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진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코하네는 하즈키의 집에
머무는 것이 불편했다.
꾸준히 나오코의 방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어색하게 마주치는 게 싫었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는 것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문두스를 그만두고 나서도
코하네는 오전과 오후 시간이
조금씩 틀어지는 바람에
가끔 일찍 잠이 들면
꼬박 밤을 새우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하즈키는 점심시간도
거르고 배달 일을 했다.
빠른 마무리를 하고 싶은 해는
턱걸이하듯,
짙은 주황색을 내뿜고 있었다.
하즈키는 일을 마치자마자
늘, 잠시 머뭇거림도 없이
코하네의 집으로 달렸다.
조금의 시간도
지체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과일 상자와
채소 상자를 실어 나르면서
한 번도 코하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운전대를 잡은
손과 속도를 내는 오른발은
점점 바빠진다.
오늘따라 시간을 좀 먹는
초인종이 얄밉다.
“철컥.”
코하네의 얼굴은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얼굴이다.
말 대신 하즈키를 보고
맑게 웃어 보인다.
하즈키는 두 손으로
코하네를 꼭, 끌어안았다.
안고 있어도 그녀가 없는 것 같아
그녀가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더욱 세게, 세게 끌어안는다.
“하즈.. 키?”
코하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그의 손보다 더 작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맞춤했다.
코하네는 놀라는 듯, 하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하즈키는 코하네의 얼굴을
먹어 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코하네의 몸 구석구석에
그의 입술이 닫지 않는 곳이 없다.
그녀를 탐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았다.
팔 하나로도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는 그녀의 몸은
새털과 같다.
잠이 덜 깬 얼굴이
어느새 발그레해졌다.
하즈키는 그런 그녀의 얼굴만
보아도 바다가 갈라질 듯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수줍게
그의 목을 감싸며 끌어안았다.
하즈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 사랑해
사랑, 해 너무… 너무.”
하즈키는 이토록 누군가를
강렬하게 원한 적 없었다.
그는 자기의 형체가
사라져도 좋으니
그녀의 차가운 피가 돼서라도
그녀의 몸 안에서 머물고 싶다.
그의 땀구멍에서
새어 나온 온갖 것들이
식을 때쯤 코하네가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하즈키는 긴장이 풀린 몸을
더 누이고 싶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될까?”
코하네가 그에게 다가와
얼굴을 위에서 바라보았다.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은 쉬어요.”
그녀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당신도 함께.”
코하네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위로 말려 올라간
흰 원피스를 훌러덩, 벗어
던지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어깻죽지에
날개가 부러진 듯한
상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날개가 부러져서 다행이라며
실없는 생각에 그는 피식거린다.
코하네는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하즈키의 눈은
코하네의 새하얀 어깨에서
미끄럼을 타다
납작한 엉덩이에서 멈춘다.
허벅지 사이로 화장실 문이 보인다.
하즈키는 허공에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 보지만
빠르게 화장실 문은 닫혔다.
그의 눈도 스르르 닫혔다.
코하네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때마다
일회성으로 일을 했다.
일을 마치는 시간대가
늘 그와 어긋났다.
하긴 그녀가 일을 하지 않을 때도
그녀의 수면은 늘
새벽에 시작해서
정오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가 일부러 일찍
일을 마쳐도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눈을 감고 싶지 않았지만
신선한 바람이 들어와
그의 노곤함을 더욱 부추겼다.
그녀를 안고 난 후,
잠은 정말 달콤했다.
그녀를 만나고 난 후,
어릴 적부터 복용해야만 했던
약은 그의 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잠이 달콤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 중이기도 했다.
코하네는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머리통의 맨살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길이는 제 멋대로,
정말 못난이 인형이 따로 없다.
인상을 찌푸리며
거울을 바라본다.
사랑을 받는 여자로서
아름다움에 애쓰지 않는 여자가
자신 앞에 있었다.
놈, 이라는 단어를 붙여 불러도
그녀는 금방 네라고 대답할 것 같다.
코하네는 가위를 들어
들쑥날쑥한 앞머리를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었다.
보기 싫은 구레나룻의
지저분한 잔털들은
하즈키의 면도기를 사용했다.
일정한 모양의 앞머리 덕에
더 사내 같거나
멍청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사랑받는 여자로서
꽤 노력했다고 생각하며
거울에 비친 아이를 보고 웃었다.
자란 머리카락을 보고
미소 짓는 마호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