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마지막

5. 겐토

by 금봉





1977년 마지막 달을 남기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차가운 계절에 똑같이 마주하고 있는

회색 건물은 다시 본 그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건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바닷바람보다 더 냉기가 가득했다.

쇼는 다섯 살을 맞이하는

아이답게 차가운 바람 앞에서도

점잖게 굴었다.

이번에도 거절이란 단어를

듣고 나서야 한다면

누구보다 더 쇼가 서운할 것이 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지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쇼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정말 소중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삼 년을 반복해 매년,

회색 건물 속,

유치원 입학 상담사는

올 때마다 다른 얼굴이다.

덕분에 겐토와 나오코는

오직 자료에서만 확인되는 것들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매년 같은 말을 꺼내야만 했다.


의사들이 쓰는 발작, 이란

단어에 대해서 전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담사에게

설명해야 하는 건,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늘도 쇼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나오코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오므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중이다.


쇼는 웬만한 말은 또래 아이들보다

이해가 훨씬 빠른 아이다.

상담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겐토가

아이의 손을 잡고

상담가에게 양해를 구하며

밖으로 나섰다.


“덜컹.”


나오코는 긴 설명을 마치며

유리컵에 담긴 물을

모두 마셔버린다.

상담사의 입에서는

아주 긴 한숨부터 시작할 게 뻔했다.

이런 경우는 화가 나지만

어느 곳을 가도

같은 그림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긴 한숨 끝에 상담사가 입을 열었다.

상담사가 쥐고 있는 노란색 연필은

쇼의 검사 결과에 동그라미가 아닌

브이 자 모양을

계속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오코의 인내심은

24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길어졌다.


“어머니.”


꿀꺽, 침을 삼켰다.


“네, 말씀하세요.”


“쇼는 그럼 현재

전문 기관에서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인 거죠?”


“전에도 이 부분에 관해

얘기했지만 전 전문 기관에

아이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이 보신 것처럼,

아이는 보통 아이와 같아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만,
유치원을 다니면서

아이가 발작 증세를 보인다면
그 후 생활은 많은 아이들이

더욱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본 후,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쇼와 다른 보통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 곳이기 때문에…
앗 죄송합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적절치 못한 표현이라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나오코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말하자면,

그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쇼를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지

나오코는 상담사의 말을

뚝 잘라버렸다.


“아, 무슨 말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상담사는 끝까지 자신들은

아이가 받을 상처나,

친구들과 유대관계,

또는 발달 과정에 입힐

해로운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척, 을 떨었다.

당연히 보통의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가 섞여 있다면

그걸,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라고

어떤 곳이든지 그 솔직한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오코는 중간 부분의 척,

떠는 말들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오코가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는 얘기인가요? 올해도?”


“나오코씨, 허가라는 의미보다도
아이의 발달 과정에

조금이라도 해가 간다면
더 쇼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나오코는 다시

상담사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허가할 수 없다고

솔직히 전달하는 것이
쇼의 발달 과정에

더 도움이 되는 거겠죠.”


“이 부분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입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제 아이가 쇼라고 한다면…”


나오코의 눈썹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전 전문학교를 선택할 것입니다
더 나은 환경과 비슷한 아이들과

교육을 받는다면
쇼에게 더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나오코는 더 이상

상담사의 말을 듣고 있을

인내심이 바닥났다.


“당신 자식이 라면, 이라고 했나요?
참, 말 굉장히 쉽게 떠드는군요
삼 년 동안 이곳에

쇼가 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고맙군요,
보시다시피 쇼는 아주 정상입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이런 쓰레기 같은 말들을 하는

선생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해서

평생 잊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담사는 입을 벌리고 앉아

나오코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오코는 상담사가 들고 있는

쇼의 정보가 담긴 자료를

모두 낚아채더니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문고리를 잡고

나오는 순간에도

끝까지 상담사의 말을 듣지 않고

나옴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상담사 말대로

입학 허가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겐토의 품에서

잠든 쇼의 모습을 보니

울분을 참을 수가 없다.

겐토는 그녀의 표정과 발걸음,

올라간 어깨만 보아도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가늠했다.

맛보면 쓸 것 같은 미소를

나오코에게 보내며

애써 괜찮다는 표정도 지어 본다.


겐토는 전문학교에 쇼를 보내면

쇼는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닐 것이다,라는

말을 늘 해왔다.

나오코는 겐토와 다르게

사립 유치원을 고수했다.

결국 3년을 방황하다

내린 결론이 고작, 처음과 같다는 것,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는 것, 이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제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표정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쇼가

받을 상처가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에 돌덩어리가

하나 더 쌓인 기분이 들었다.

겐토가 쇼를 품에

더욱 꼭, 안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나오코 가자.”


집으로 가는 내내

운전대를 잡은 겐토는

창밖만 바라보는

나오코를 흘긋거렸다.

눈치를 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꿈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오코.”


“왜 난 이룰 수가 없는 걸까,

벌을 받는 건가…”


벌, 이라는 단어에 겐토는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 페달을

세게 밟았다.

차가 덜컹거리며 크게 꿀렁거렸지만

복잡하지 않은 도로가 한몫한다.

잠에서 깬 쇼가

옆자리 엄마보다

먼저 아빠를 찾았다.

나오코는 쇼를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아빠?”


안전을 확인한 겐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응 그래 쇼.”


쇼의 입술이 하얗게

바싹 말라 틈이 갈라져 보인다.


“아빠, 목말라요.”


나오코는 겐토의 입이

먼저 소리를 내기 전에

아이의 말을 빠르게 받아친다.


“참아, 곧 집이야.”


쇼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답할 사이 없이

기죽은 쇼를 보며

겐토는 액셀을 밟으며 속도를 냈다.


겐토는 며칠 동안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승진을 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을

만끽할 사이 없이

현관문 앞에서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고,

몇 번의 머뭇거림을 했는지 모른다.

오늘따라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신경이 쓰인다.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공기를 삼키고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 올려 부른다.


“아빠 왔다, 쇼오오.”


생선조림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어

식욕을 자극했다.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지루하다고 말하던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쇼오, 쇼, 어디 숨을 거야?”


앞치마를 두른 나오코가

현관 앞까지 급하게 뛰어나오며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댄다.


“쉬잇, 쉬.”


겐토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웬일인지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얼마 만에 보는 생기인지

조용한 아이의 목소리는

신경 쓸 일이 아닌 듯하다.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어요.”


“으응? 지금?”


하루 종일 이 시간만을 기다리는 쇼,

답지 않은 모습이다.

겐토는 이해할 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어디 아픈 거야?”


나오코는 무슨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우선 씻고 와요,

할 얘기가 많아.”


나오코와의 사이에

할 말이 많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을까? 라며

기억을 더듬다 보면

싸우던 상황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이 시간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응, 금방 나갈게.”


아닌 척하지만

벌써 급한 마음에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바지 구멍에 발을 넣기가

왜 그리 힘든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잠든 아이의 모습을

확인할 시간도 없는 모양이다.


겐토는 식탁을 보자마자

입이 떡, 하고 벌어진다.
일주일 치 생활비를 다 쓴

모양처럼 음식들의 개수가

어마어마했다.


“뭐 하고 있어요? 앉아요.”


“어, 어 그래.”


겐토는 나오코의 기분을

능숙하게 요리할 줄 아는

남자가 된 지 오래다.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줄 요량이다.

나오코는 생선 뱃살 부분을

그릇에 덜어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코하네가 왔었어, 물론 하즈키도 함께.”


“그래? 좀 기다리지.”


“갈 곳이 있다고, 해."


본격적으로 하즈키와

코하네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나오코는 코하네와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다.

가끔 통화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수화기 속 목소리가 류(코하네의 한국 성),

씨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궁금했지만 겐토는 묻지 않았고

하즈키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나츠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이 옳다,라고

내심 안도를 하는 모습이었다.

코하네가 왔었다는 말을 들은

겐토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간이 적절히 밴 생선을

맛있게 씹어 먹었다.


“결혼… 한데.”


그제야 겐토는

발라 먹다 남은

생선 가시를 내려놓는다.


“직접 말했어?”


나오코는 겐토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맥주 캔을

꺼내 들었다.

요즘 들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나오코다.


“하즈키가… 뭐 코하네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이 자식, 기어코 하려는 거네.”


“무슨 뜻이에요?”


겐토는 늘, 코하네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은

그들의 감정과는 다른 문제였지만,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코하네는 하즈키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즈키는 마호를 보며

코하네가 마호를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지만 겐토는 늘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나오코는 코하네의 일이라면

하즈키의 일처럼 반응하거나,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을 한다.

겐토는 나오코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단어를

찾느라 대답이 점점 늦어진다.


“별 뜻은 없어,

만난 지 꽤 되었지만, 글쎄.”


나오코가 마치 학생 때

교복을 입고 수줍게 웃었던 얼굴처럼

표정을 지었다.


“그게 반대의 뜻인 거지.”


겐토도 함께 웃는다.


“내가 그렇다고

안 할 자식도 아니고,

잘 됐으면 좋겠다.”


나오코는 맥주를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코끝으로 탄산이 뿜어

나올 것처럼 매웠다.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천천히 마셔.”


“그리고 할 말이 있어.”


겐토는 조금 놀란 눈치다.

하즈키와 코하네의 결혼 이야기가

그녀에게 중요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한데 나오코에게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일지,

자기도 모르게 미세하게

다리를 덜덜거리고 있었다.


“쇼오…”


겐토는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코의 입에서 새어 나오자,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도

이미 쇼는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다,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내년부터 유치원에 보낼 수 있어.”


특수가, 아닌 유치원이란 말에

겐토는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


“연락이 왔어,

쇼를 입학시키겠다고
몇 번이나 나를 설득,

하다시피 했어

나를 설득했다고,
쇼를 입학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믿어져?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었거든.”


겐토는 나오코와 다른 생각이었다.

쇼의 발작이 시작되면

전문가가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순간들이 더 많았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전문가가 있는 곳으로

교육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나오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상담가의 말처럼

쇼가 다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일찍 쇼를 데리고 다녀왔어.”


“그래서 결정했다는 얘기야?”


겐토는 자신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아이의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이

조금 서운하다.


“당신에게 말하려 했지만,

사무실에 없다고 해서”


승진으로 하루 종일

인사를 다니느라

앉아 있을 사이가 없었다.


“아, 그렇군.”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에서

쇼도 함께 어울렸어
물론 그 아이들을

내년에 볼 수는 없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 치곤…

정말이지 쇼는…
쇼는 평상시 아무 이상이

없는 아이, 인데… 왜, 대체.”


말하는 내내 나오코는

목으로 넘어가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말했다.


“나오코…”


“물론 의무실도 있고

쇼는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흠…”


나오코는 겐토의 짧은

대답에 서운함을 표현하며 말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애써

노력한 거야, 쇼도 기쁠 거야
근데 당신은 기쁘지 않은 거지?”


“기쁘지 않다니,

그런 말이 어딨 어?”


나오코의 목소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기쁘지 않은 거야
당신은 꼭 쇼를

그곳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오코, 난 정말 기뻐,

하지만 쇼가 다칠까 봐
그 생각 하나뿐이야.”


“당신만 걱정하는 문제 아니에요.”


“알아 나오코,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늘 고맙고.”


겐토는 나오코에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었다.

이제까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꼭,

쇼가 발작할 때나,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하는

행동을 할 때만

꾸준히 복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의 권유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유치원을 다니며

쇼가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이기 때문이다.

겐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오코,

이건 중요한 이야기야,
쇼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좋은 일들이 더 많겠지만
좋지 않은 일들도 있을 거라 생각해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방지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야.”


나오코가 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일 병원을 들를 거야
유치원에 가게 됐다고 하면

아마 처방 약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고.”


겐토는 이제야

기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승진했지만 하루 종일

익지 않은 밀가루 덩어리가

가슴에 박힌 느낌에

소화제를 먹었지만

소용없는 하루였다.

체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식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생했어, 나오코.”


“당신도요.”


“참, 오늘 승진 결과 나왔어.”


나오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서 빨리 결론을 말하라며

눈빛으로 재촉하고 있다.


“하하, 과장이야.”


나오코의 입술 양쪽 꼬리가

귀까지 올라간다.


“오늘은 정말 대단한 날인데?

축하해요 당신.”


호들갑스럽게 어깨를 올리며

냉장고 안에서

맥주를 꺼내 컵에 따라내며 말했다.


“자, 받아요.”


“응 오늘 정말 기뻐,

당신 때문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집 안의 온기와

어우러져 가득했다.

마침 잠에서 깬 쇼가

발바닥을 질질 끌며

눈을 비비적거리며 다가온다.

쇼가 일어나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리 와, 쇼오.”


“아빠.”


“어쿠, 하루 사이에 더

무거워진 것 같은데?”


일 년 사이 꽤 통통해진 쇼를 보니,

기쁨이 가득한 만족감이

더욱 상승하고 있다.


“배고파요.”


나오코가 빠르게

아이의 밥을 준비한다.

칭얼거릴 때마다

아이의 밥그릇을 빼앗던

그날이 엊그제 같았는데,

다른 이들과는 반대로

빠르게 흘러 준 시간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날, 저녁 시간은

아주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출처, 리틀 포레스트


겨울을 맞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꽃이 창문을 두드리며

알아 달라 성화지만

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웃고 또 웃었다.


겨울을 맞이한 첫 눈치고

완벽하게, 소복하게

두툼하게 쌓인 모양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그곳을 밟고 지나가려 하니,

미안함에 잠시 멈칫, 거렸다.

따라 걷던 하즈키도

코하네를 따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추위에 코와 볼이 빨개진

코하네가 콧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먼저 가요.”


하즈키가 발을 디디며 말했다.


“같이 가.”


코하네의 작은 손을

하즈키의 주머니 속에 넣으며

혹여, 깊은 눈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힘을 주어 나란히 걸었다.

코하네는 아키라를 보내고 난 후,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은

구둣방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숨이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며

이젠 정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코하네는 하즈키가

꽁꽁 싸매어준 목도리와

방한 마스크를

천천히 벗으며 헐떡거렸다.

멀리 보이는 구둣방의 거리를

확인하며 그가 말했다.


“백 미터.”


“으응, 잠시만 헉 헉.”


늘 걷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코하네는 헐떡거렸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건

처음이에요 허억 헉 헉.”


갑자기 하즈키가

코하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자.”


“으응?”


“업혀.”


아무 말 없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코하네는 그의 등을 날름, 받아먹었다.


“크윽.”


장난기가 발동한 코하네는

업히자마자,

풀린 목도리로 자신의 목과

그의 목을 돌돌 말았다.


“코하네 언제 꿍, 하고

떨어질지 몰라.”


“이힛.”


하즈키는 코하네가

자신의 등에 업힌 것을

따뜻한 온기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간격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팔을 둘러 자신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 짧은 거리에서도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이 든 것처럼 굴었다.


하즈키의 걷는 보폭이

어느 때보다 더 좁다.

오래된 나무 덕에

늘 칙칙해 보이던 구둣방이

푸른빛이 도는

페인트로 빈틈없이

칠해져 있었다.

그 빛은 눈에 반사되어

그들의 눈동자에서 반짝거린다.

코하네는 잘못 찾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좌우로 확인하는 중이다.


“여기 맞아 코하네.”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들어가요.”


푸른빛이 도는 문 꼭대기에

작은 십자가가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노아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코하네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멘.”


바깥의 찬 공기와

대조적으로 구둣방 안의

햇살이 그들을 비춰주니

그들의 행복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느낌이다.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진다.

유키코가 먼저 일어나

그들을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하즈키.”


“안녕하십니까.”


몇 번의 만남을 나누었지만

하즈키는 그들만 보면

늘 어깨가 꼿꼿하게 굳기 시작한다.


“유키 너무 좋아 보여요.”


코하네는 통통하게

볼살이 오른 그녀를 보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노아는 여전히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구둣방은 아키라가 머물렀을 때

비해 그리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꽃향기가 멈추지 않았고

가득 들어찬 빛은

그곳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빛에 눈을 찡그릴 만도 했지만

여간 따뜻한 게 아니다.


아키라가 늘 앉아 있던 의자는

같은 색의 가죽을 덧댄 것으로 보였다.

아주 오래된 물건이라

같은 색깔의 가죽을 찾기에도

힘들었을 터,

역시 노아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뤄내는 사람이다.

유키코가 어울리지 않게

박수를 치며 호들갑 떨었다.


“자자, 다 모였으니

잠깐만 기다려줘요.”


하즈키는 아직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네.”


코하네가 작은 소리로 키득거린다.

유키코가 준비한 카스텔라와

커피 향이 잘도 어우러진다.

유키코가 카스텔라를

접시에 담아 하즈키에게 먼저 내밀었다.


“자, 먹어 봐요.”


“넵, 감사합니다.”


“코하네도 먹어 봐.”


“네 잘 먹겠습니다.”

샛노란 카스텔라는

노아의 머리칼 색깔과도

참 잘 어울린다.

꽤 늘어난 말솜씨로

노아가 말했다.


“유키, 아주 맛있어요.”


유키코의 얼굴은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

완벽하게 행복한

여자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몇 번이나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며

싱글거린다.


“귀한 노른자를

얼마나 썼는지 몰라
이번 건 내가 먹어 봐도

정말 완벽하게 잘 됐어.”


달콤한 카스텔라를

한입 베어 물고

커피와 함께 씹어 삼키면

그리 맛있을 수가 없다.

코하네는 유키코의 요리 실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 요리사처럼

완벽해지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노아가 미국에서

꼭 챙겨 온 것이 커피라고 한다.

노아가 내어준 커피 맛을

본 순간, 급박한 상황에서도 왜,

그것을 챙겨 올 수밖에 없었든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재밌는 건 그들이

커피의 맛에 감탄하고 있을 때

노아가 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미국 것이 아니에요.”


미국 커피인 줄로만 알았던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유키코는 종이봉투에

새 카스텔라를 담아

코하네의 것이라며

문 옆 탁자에 정성스럽게 올려놓는다.


추워진 날씨,

해가 나와 있는 시간이

짧아진 요즘,

5시도 안 된 시간

새벽처럼 어슴푸레하다.


새로 장만한 중고 텔레비전의 화질이

썩 좋지 않지만,

적막한 아키라의 구둣방에서는

사람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하네는 하즈키에게

자신의 방을 제대로 소개할 작정이다.

그곳을 노아와 유키코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바랐지만,

유키코의 고집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 그곳을 들른다 해도

2층 다락방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키라가 떠난 후,

이곳에 올라오는 일이 없었다.

마치 방금 청소를 마친 것처럼,

새하얀 이불,

코하네가 붙여 놓은 비틀스,

먼지 하나 없는 백합이 꼽힌 꽃병,

살짝 보일 듯 말 듯한 살색의 커튼,

좁은 창가에 놓인 마네키 인형들,

아키라의 양화,

낡은 재봉틀까지,

그녀의 방은 완벽하게 옛, 과 같았다.


싱그럽게 꽂혀 있는 백합이 수상하다.

아키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 때,

마호가 늘 한 번씩 꽂아 둔 꽃이었다.

코하네는 설마,라고 말하는

고개 짓하며 피식 쓴웃음을 짓는다.

백합의 향기가

코하네의 감정과 머리를

어지럽힐 작정이다.

백합에 코하네를 놓친 하즈키는

벌써 세 번째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본다.


“코,, 하네?


드디어 코하네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으응, 하즈키.”


코하네가 하즈키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어 이끌었다.

그녀의 작은 손을

손안에 가득 담는다.


“백합, 좋아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아직 모르는 게 많아.”


“그래서 좋아요.”


코하네는 창문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럼 알아도 모른 척, 해야겠어.”


“큿.”


창문을 열자,

창문 사이에서 녹은 눈이

똑, 똑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어둠과 고요함은 단짝이 아니라 할까,

오늘도 친한 척, 이다.

강 위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이

공포스럽다.

코하네가 건너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기 요, 마호 집.”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그들이 같은 동네에

머물고 있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꽤 오랫동안 마호 얘기를

하지 않았던 그녀다.

솔직히 하즈키는

소식이 영 없는 마호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 마호의 이름을 들으니

그 또한 반갑기도 하다.

때론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만큼,

고통스러울 때가 없었다.

마호의 이야기를 꺼내 준

그녀가 고마웠다.


“꽤 가깝네.”


“할아버진 마호네

달걀만 드셨어요,

생선도 물론.”


아주머니가 계셨을 땐,

할아버지의 건강도 좋았었는데,
아주머닌 늘 가장

신선한 달걀을 챙겨주셨어요,
더 이상 달걀을

살 수 없을 때부터인 거 같아요.…
할아버지 건강은…

내가 빨리 알아채지 못한 거예요.”


하즈키가 코하네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마호 씨의 어머니는?”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빛난다.


“아주머니는 정말

좋은 분과 함께 섬으로 가셨어요,
그곳 하늘은 파란 물감 같아요,

그런 하늘 본 적 있어요?”


하즈키가 고개를 저었다.


“마호와 함께 여름에 갔었는데,

거긴 정말 더워요
모래는 하얗고, 하늘은 파랗고,

나뭇잎은 짙어요,

참 바다는 정말 짜요.”


“하하하하하.”


계속 들이닥치는 바람에

코하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즈키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창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때 코하네의 돌고래 같은

음성이 들린다.


“아앗, 잠깐만요, 켜졌어요.”


코하네가 한달음에

일 층으로 내려간다.

하즈키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를 빠르게 따라 내려갔다.


“쿵쾅쿵쾅.”


새털처럼 가벼운 그녀가

쿵쿵거리니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노아와 유키코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본다.


“코하네에?”


그제야 그녀의 발에

브레이크가 잡혔다.


“마호가 왔나 봐요.”


유키코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마호는 어제 왔어,

여기도 들렀는데, 몰랐던 거야?
으이구, 깜짝 놀랬다.”

유키코는 마호와 코하네의

서로에 대한 근황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 할 셈이다.

솔직히 유키코는 코하네를 말없이

위해주는 마호를 늘 칭찬했었다.
하지만 처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코하네를 자신의 맘처럼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마치 엄마라도 된 것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즈키 또한 좋은 사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하즈키는

마호의 집에 불이 켜졌다는

뜻이란 것을 그때 알아차린다.

잘 드러내지 않던

코하네의 흥분하는 모습은

빠르게 식어 들어갔다.

백합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잘 맞게 떨어졌다.


마호의 마음을

생각해 주지도 않고

무작정 그의 집으로 뛰어갔다면

안될 게 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코하네는 숨을 고르고

아키라의 의자에 앉았다.

하즈키는 순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말을 꺼냈다.


“그럼, 마호 씨를 불러올게요,

마실 것도 좀 사고.”


코하네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노아가 끼어들며 말했다.


“아주 좋아요, 우리 그렇게 해요.”


유키코는 노아에게

입맞춤하며 일어선다.


“그럼 난, 남은 음식 좀 준비할 게,

오랜만에 근사한 밤이 되겠어.”


코하네는 좀 난감하다.

예전 같았다면

상황을 생각할 것도 없이

마호를 불렀을 테다.

하지만 지금 마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간다면

그 또한 난감할 것이 뻔했다.

코하네는 정말 마호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됐다.


“그럼 코하네가 다녀와요,

난 마실 것 좀 사 올게.”


하즈키는 말이 끝나자마자,

코하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

하즈키는 그녀를 위한

멋진 배려였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아키라의 의자에서

꿈쩍 않는 코하네를 보며

유키코가 거들었다.

유키코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람 같다.


“코하네, 얼른 다녀와,

언제까지 못 볼 거야?”


“유키…”


“마호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코하네가 쭈뼛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로 어깨를 말아 쥐며 걷는다.


“다녀올게요.”


“마호가 좋아하는 콩도 삶아 놓을게.”


“네.”


노아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레코드판이 놓여 있는

선반을 기웃거린다.


The Beatles


-yester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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