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울타리
신부님의 경이로운
목소리가 울릴 때
함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잘못 들었을까,
라는 생각에 빠졌을 때,
다시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미소를 띨 만큼
기분 좋고 아름다운 소리다.
그녀의 머리 위는 하얀색,
분홍색의 꽃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눈을 감고 냄새만 맡아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주위 모든 것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만 보이고
그녀의 향기만 가득했다.
하얀 드레스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흰 피부는 빛이 났다.
마호의 얼굴은 섬에
있을 때보다 더 까맣다.
정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다시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다니는 거친 말과 같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가장
정리되어 있지 않은 한 사람이다.
질끈 묶은 머리칼마저
거친 시베리아의 풀과 같다.
마호는 자신도 모르게
멀리서 행복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잡힐 수도 있겠다며
희미하게 웃어본다.
마침내 성당 안의 종소리가
그들을 내세우며 축복했다.
‘이제 됐어.’
마호는 코하네의 사진을 찍었다.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뒤로하고
홀로 그는 성당 안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목에 둘러맨 카메라가
할 일을 마치니 거추장스럽다.
오랜만에 들르는 문두스다.
웬일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의아했다.
문두스에서 그녀와 함께
일할 때부터 즐겨 듣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오랜만이라 약간의 감정에
젖어들었다.
그녀가 신부가 되는 이날,
참 기가 막힌 때를 잘 맞춘 것 같다.
그가 이층으로 천천히
올라가 확인할 참이다.
유리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틈타,
시원한 바람이
문두스 안을 휘감았다.
페퍼민트를 입에 문 것처럼
정말 상쾌하다.
“앗.”
리리카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뭔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놀란 마음에
리리카를 소리치며 불렀다.
“리리카, 리리이.”
그녀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친 듯 달려와 마호에게 안긴다.
그는 몇 번을 밀치다가,
이내 포기하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준다.
“마호씨.”
그가 그녀를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 왜 저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위험하게.”
통통하게 살 집이 오른
그녀의 운동복 차림이
참, 귀여워 보인다.
“마호씨가 당연히
올 줄 알고, 기다렸어요.”
그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모른 척, 한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리리카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왔다 갔다 따라다닌다.
“코하네를 보러 갔다가,
성당은 너무 지루해요
견디다 못해 나왔어요,
당신도 눈에 보이지 않고,
혹시 또 놓칠까
얼른 나왔어요.”
리리카의 사랑은 언제 봐도
슬퍼 보이지 않는다.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다시 그에 따른 대답은 없다.
“차 마실래요?”
“응 고마워.”
리리카가 마호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굉장히 오래된 일이다.
처음엔 코하네를 마치
수호천사처럼 행하는 그를 보고,
그녀를 질투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다.
그의 친절은
온전히 코하네가 차지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당연했다고 생각했다.
리리카는 그녀가 없는
마호의 모습이 어땠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빈틈이 없어 보이던 그는
정말 빈틈투성이의 남자였다.
리리카는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며
그에게 직접 으름장까지 놓았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그녀가 참, 부럽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마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번엔 언제 떠나요?”
“오늘.”
“뭐라고요?
당신은 정말 문두스에 있는 나를
너무 믿는 건가요?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가요?”
그는 그녀를 제외한
모든 다른 사람에게는
감정이 없는 사람 같다.
“열심히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진심이야.”
리리카는 늘,
문두스의 안주인이 되는
꿈을 꾼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문두스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꽤 자리를 잡았다.
또한 그가 마련해 준
집은 부촌과 다름없다.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만,
제외하면 남 부러운 것은
어떤 것도 없다.
“부탁이 있어요.”
마호가 통통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밥 먹어요,
그리고 떠나요.”
마호가 아주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하.”
“알았다는 거죠?”
“하하하, 그래 알았어
하지만 좀 서둘러.”
그녀는 빠르게 탈의실로 뛰어간다.
“네.”
마호는 카메라를
보관함에 넣어두고, 짐을 챙겼다.
제법 더워질 날씨를
대비해 준비할 것이 많다.
이번에는 한 달 정도를
섬에 있을 생각이다.
미쿠의 생일을 맞아,
축하해 줄 선물을 찾다 보니
켄타가 한마디 거들었다.
“오랫동안 있는 거 아니겠어?”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한 여름 뜨거운 해변을
미친 듯이 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겐타의 밀약으로
그가 섬으로 가는 건,
미쿠가 아직 알지 못한다.
이번엔 미쿠에게
코하네의 결혼을
설명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지만,
언제까지 미쿠에게
코하네가 가족이 될 수 있는
희망의 끈을
잡고 있게 할 순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월광 소나타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미쿠와 살던 집을 팔고
꼭 필요한 짐들만 문두스에
갖다 놓았다.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직도 미련을 남긴 채
그대로 있었다.
하얀 국화꽃 모양의 핀이
서랍에 덩그러니, 있다.
그녀가 긴 머리칼을
휘날릴 때마다
꽂고 있었던 핀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때 그녀의 핀을
주머니에 넣어 간직했었다.
“우웃.”
마호는 핀을 가방 앞주머니에 챙겼다.
다시 페퍼민트의 향이
날리는 것만 같다.
리리카는 문두스에서
매일 접하는 초밥을 보고,
또 먹으면서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점심 선택은 또 초밥이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집이라며,
수산시장과 가까운 곳이라
모든 음식이 신선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리카는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입안으로 음식이 들어가기 전에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는 따뜻한 녹차를 후후,
불어가며 그마저 맛있게 들이켠다.
“아, 기억이 났다.”
마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왔었던 사람 맞죠?”
“누굴 말하는 거야?”
“마호 씨가 섬에 갔을 때,
온 사람들 말이에요.”
그는 얼음이 담긴
녹차를 후루룩 마신다.
“지루하다면서,
자세히도 보고 왔네.”
“신랑 꽤 잘 생겼던데,
뭐 눈에 띄니까.”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리리카는 묻지 않는다.
당연히 답해 줄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뭐, 내 눈엔 마호 씨가 나아요.”
“다 먹은 거지?”
“일어나게요?”
그가 두 손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알았어요.”
그녀가 통통한 볼살을 움직이며
뾰로통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계산을 마치자,
그녀의 얼굴은 한껏 더 심각하다.
“자, 리리카
나는 이쪽으로 가야 해.”
“알아요.”
마호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잘 알아 둬,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쉬면서, 알지?”
그녀는 리리카답게
그에게 와락, 안기며 속삭였다.
“당신도 잘 알아 둬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
그의 볼에 붉은 입술 자국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리리.”
“힛, 그럼 나 가요 대장!
연락해요.”
그는 당황스러워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그녀가 소리쳤다.
“아참, 미쿠에게
꼭 안부 전해줘요.”
그녀의 초록빛 원피스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크게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기분이 좋다.
오늘 둘러맨 배낭은 꽤 무겁다.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그는 잊지 않고
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가 때인지 형형색색 꽃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다.
꽃을 좋아하는
코하네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화원 안으로 들어서자,
키가 큰 백합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향기에 취해
넘어질 정도로 진한 향이 풍겼다.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간,
그들에게 정신을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정말 잘 자란
튼튼하고 잎이 넓은
백합을 골랐다.
걸을 때마다 풍기는 향이
그를 그냥 두지 않고
기억 속으로 자꾸 데려간다.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구둣방 앞에 다다랐다.
습한 날씨가
그의 온몸 땀구멍을
그냥 둘 리가 없다.
벌써 겨드랑이와
쇄골 밑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다.
아키라가 만들어 놓은
작은 의자가 이럴 땐 참, 고맙다.
그는 백합 다발을
텅 비어 있는 도자기 속에 꽂았다.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끈으로 매듭을 짓다가,
끈 풀기를 어려워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백합을
문 앞에 뉘어 놓았다.
다시 과거로 들어가 본다.
그녀의 집에 들어가 매일매일,
백합을 꽂아 두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속삭인다.
“난,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향수?”
“에이 마호,
정말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어.”
“어떤 향기가 났으면 좋겠어?”
“음, 아주 진해서
그 향기만 맡아도
날 알아차리는 그런 향기.”
마호는 그때부터
그녀에게 늘 백합을 선물했다.
정말 그 향기만 맡으면
그녀의 말처럼,
그녀인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아프거나, 떨리거나.
그의 눈동자가
뿌옇게 보이는 건 착각일까,
갑자기 하늘을 올려 보며
몇 번을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배낭을 둘렀다.
‘그때 봐, 갈게,
진심으로 축복해.’
늘 걷던 길이 이렇게 새롭고
아쉬울 수가 없다.
그녀는 결혼 후,
그녀의 지금 집보다 더 넓은
하즈키의 집으로 옮긴다고 한다.
유키코는 곧 노아를 따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유키코가 그녀를 몇 번이나
설득하며 구둣방에
머물러 주기를 원했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라며
완강히 거절했다.
하즈키를 이용한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코하네는 유키코가 미국으로 떠난 후,
그곳이 더 이상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 되지 못할 거란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호는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락날락하며 바닥 한번
쳐다보지 않고 짐만 챙기려
들르던 예전 미쿠의
집이 보인다.
집 앞 강가를 두르고 있는
난간에 올라가,
코하네가 구둣방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보다,
떨어질 뻔한 기억이 수만 번,
어느 정도 익숙하게,
기술을 부리며 올라가기 시작했을 땐,
이미 그들은 좀 더
큰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훗.”
긴 세월 속, 씁쓸하거나
애처롭거나 아름다운
그 혼자만의 찰나다.
무슨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로의 동의 따위도
주변의 동의 따위도
필요 없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게 맞을까란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걸 마치고
숨을 쉴 수 있었을 때 비로소,
하즈키의 아내가 되었다는
생각의 현실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그녀의 옆에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반짝이는 커다란 갈색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여전히 마호와 함께했던
기억은 어느 곳을 가든,
날아든다.
그곳은 아키라고 죽고,
마호와 함께 간 게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마주할
미네코를 보는 일보다
그곳을 간다는 게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긴장감이
손을 맡긴 그에게 전해진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그들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 듯한 모습이다.
미네코의 집은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물론 마나츠는 그녀를,
또는 하즈키를 잊지 않고
그곳을 찾았다.
결혼식 참석 후,
처음 그녀와 나란히
고향을 찾은 그다.
마나츠는 시간이 흐를수록,
살점 하나 붙어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는
미네코를 안타까워했다.
미네코는 오랫동안
외모에 신경 쓰지 않은
티가 너무 났다.
마나츠가 그녀의 얼굴에
요란한 색깔을 칠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꾸미기를 포기한
미네코가 오히려 마나츠를 다독인다.
“괜찮아, 그만.”
“그럼 립스틱이라도…”
“늙음은 자연스러운 거야.
마나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렇게 철학적이고
멋스럽게 들리기는 처음이다.
“그 아이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괜찮아.”
“네,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미네코가 여유 있게
그녀를 보며 웃어준다.
“미네코, 전 하즈키 방을
정리할게요.”
미네코가 이츠키의
눈치를 살피며 손사래 친다.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했다.”
“아.”
“시간이 좀 남았으니,
부지런히 음식 준비를 해야겠으니
도와줘.”
마나츠는 꽤,
볼록 나온 배를 잡으며
뒤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코는 마나츠를 보아
온 모습 중에서
지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입술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츠키와 마나츠는
몇 번의 시도에도
아이를 갖는 일이 어렵게 되자,
모든 부부가 그렇듯,
삐걱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남남이
되기에는 이츠키가
그녀를 너무 사랑했고,
아이가 없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그를 몰래 떠나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증상이 임신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병원에 들른 그녀를
진찰하던 의사는
운 좋게도 열이 오르는
그녀에게 감기약 처방보다
임신 여부 확인을 먼저 권유했다.
몇 번을 실패해 놓고,
그럴 리가 없다고
의사에게 화를 냈지만,
그녀 또한 자신을 꾸준히
진찰해 온 주치의 말을
귀담지 않을 순 없었다.
마나츠는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결과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한참을 얼버무렸으니 말이다.
하얗게 둥둥 뜬 놀란
얼굴을 하고
가게 안을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또다시 떠나게 해달라고
말할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이츠키는 일부러
기분 좋은 목소리로
한껏 들뜬 사람처럼 말했다.
“여보, 나오지 말고 쉬라니까,
왜 나왔어?”
그녀는 대답 없이 그에게 다가와
붉은 눈동자를 하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생긴 뱃속의 믿음에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그녀를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은 더 괴로웠다.
그녀를 품에 안긴 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츠키, 나 임신했어.”
이츠키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츠키?”
“응.”
“임신했다니까?”
“어, 어 아, 아.”
그는 할 말을 잃고 버벅거리며,
이상한 신음을 토해 내며 울었다.
“아아아, 마나츠.”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그는 주저앉았다.
그 또한 그녀처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한 말이
지만,
그는 임신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했다.
뱃속에 믿음이 생기기부터
그녀는 온 정성을 다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5개월이 접어든 지금,
그녀의 아랫배가
제법 임신부를 떠올리게 만든다.
추운 계절보다
더운 계절을 더 좋아했던
마나츠는 무거워진 몸이
느끼는 더위를 적응하기
힘든 모양이다.
움직일 때마다 선풍기 앞에
다가서는 시간이 잦아진다.
미네코가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마나츠, 그냥 앉아 있어,
그때는 그냥 앉아만
있어도 힘들 때야,
날씨 좀 보라고, 쯧.”
하즈키가 미네코를 위해서
새로 장만해 준 소파에
앉아 있던 이츠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미네코 제가 도울게요.”
미네코가 그를 보며 미소 짓는다.
“어디, 없던 일도 찾아야겠군.”
웃는 마나츠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착하지 않을 것 같던,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제법 빠르게 흘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이곳은 예전보다 더
사람들이 붐빈다.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서로의 손가락
고리를 만들어
그 틈을 잘도 벗어나는 중이다.
역을 상징하던
커다란 금시계가
새 단장을 한 모양이다.
그럴싸한 빛을
과할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역시 시계 주변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둘러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머플러를 한 멋진 아키라가
코하네를 데리러 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키라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신사였다.
금시계에 넋을 빼고 있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코하네?”
“어, 네.”
“무슨 생각해?”
그녀는 대답 대신 웃음이다.
“갈까?”
“네.”
하즈키가 다시 손가락 고리를
걸 작정이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
정신없는 곳을 바쁘게 빠져나오니,
그때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차오르는 숨이 제법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빠르게 택시를 잡았다.
걸어가도 충분할 거리였지만
하얀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스팔트 위로 열기가
만들어내는 아지랑이가
높이 높이 피어오른다.
미네코의 집 앞에 다다르자,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숨은
긴장을 가득 담고 있는 듯하다.
다시 가만히 넋을 놓는
그녀가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미소 짓고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진짜 그녀일까, 싶다.
어쩌면 그녀보다
그녀와 함께,
그곳에 있는 하즈키가
더 긴장하거나,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봐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코하네는 그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들어가요.”
그의 손에 들린 꽃 한 다발을
그녀가 들며 먼저 발을 딛는다.
“응.”
오래된 대문이 삐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초인종을 대신했다.
푸르지 않았을 때의
녹나무를 본 게
기억이 난 모양이다.
그녀는 푸르른
녹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우아아아,
그때 그 나무가 맞는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눈치 빠른 마나츠가
대문 소리를 듣고
무거운 걸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코하네, 어서 와요.”
결혼식 때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이다.
배가 나온 마나츠를 보고
코하네의 작은 눈도 커다래졌다.
“아아아, 안녕하세요.”
마나츠가 자신의 배를
쓸며 말했다.
“놀랐어요?”
하즈키가 말했다.
“와, 마나츠 다시 한번 축하해
제법 임산부 같군,
정말 보기 좋다.”
“고마워.”
마나츠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흘기며 말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자 어서 들어가자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음식 냄새가 풍겼다.
꼭, 타다요시도 나오코도 그곳,
자리에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결혼 후, 그녀와 함께,
이 집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정말이지 하즈키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고 있었다.
늙어 버린 미네코,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쭉, 해온 앞치마,
낡은 그것을 목에 둘러매고
그녀가 성큼성큼
코하네를 반겨준다.
“아, 어서 와 어서 와,
정말 반갑구나. 정말 반가워.”
미네코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기분이 좋을 땐,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하는 습관이 생긴 게 분명하다.
“잘 지내셨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무슨 그런 소릴,
아니야 아니야,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하즈키.”
하즈키는 대답 대신
오랫동안 미소를 지으며
미네코와 눈을 마주했다.
이츠키가 이층에서
쿵쾅거리며 거구의 몸으로 달려온다.
“이야, 하즈키.”
“이야, 이츠키.”
그들은 손을 맞잡으며
서로의 어깨를 번갈아 가며
툭툭, 치는 중이다.
코하네가 먼저 이츠키에게
축하의 말을 쏟아낸다.
“축하합니다. 이츠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튀어나온 배를 잡으려 말했다.
“하하하, 이 배,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하하하하하 고맙습니다.”
집 안에 큰 웃음이
오랫동안 창문 사이사이로
흘러 나간다.
미네코가 서두르며
그들에게 손짓한다.
“우선 올라가서 짐도 놓고,
잠시 쉬었다가 내려와, 응?”
하즈키가 코하네의 손을 이끌었다.
“네, 그럴게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치 아키라의 구둣방 계단처럼
그녀에게 꽤 익숙하게
삐걱거렸다.
언제 들어도 참,
반가운 소리다.
하즈키의 방은
처음 봤을 때와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그의 작은 침대를 보고
나오코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곳에서 부부 생활이라니,
이해돼?”
코하네는 순간,
당황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간이 흐른 후
별 얘기는 아니다란
생각으로 넘길 수 있는
이야기 따위로 생각하려 했다.
한데, 오늘 달라진
그의 방을 보니,
그 작은 침대에 관한
나오코의 가시 박힌 말은
코하네의 뇌리에 콕, 박혀
버리고 말았다.
하필 자신 앞에서
그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나오코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의, 나오코는 끊임없이
마나츠와 하즈키의
결혼 생활에 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마치 코하네가 하즈키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하즈키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나오코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인 듯하다.
작은 침대는 사라졌고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부부가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창가 밑은 두꺼운 요와
새것처럼 보이는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고급 여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과
같아 보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것들은 새하얗다.
그에게 방을 새로
꾸미자는 이야기는
미네코가 먼저 꺼낸 이야기다.
그녀의 말에 그는 괜찮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뒤늦게 안 사실은
이 계획 또한 나오코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코하네는 신경 써주는
그녀가 고맙지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원하지 않아도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기만 했다.
하즈키의 어머니 사진은
낡은 책상을 참,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발 빠른 나오코는
낡은 책상을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미련 없이 버렸다고 한다.
책상이 자리하던 곳에
마나츠는 꿈도 꾸지 못했던
낮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물론 마나츠는
그 광경에 대해서 감정이 미동하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쯤
미네코의 집에 모일 때면
나오코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에 대해
또다시 풀어내곤 했다.
행복이란 단어에 비하자면
마나츠는 부족한 게 없는
삶을 살고 있었고
나오코의 자극적인 말은
그녀의 인성을 더욱
돋보이게만 할 뿐이었다.
그때 보지 못한 사진이
액자에 끼워져 있다.
그 모습은 하즈키를 낳기도 전
모습처럼 굉장히
젊음이 넘쳐 보였다.
타다요시가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었던
실크 가운처럼
늘 미네코의 신경을 건드렸던 사진이다.
타다요시는 죽기 전까지도
지갑 안에 그 사진을 넣고
다녔다고 했다.
그것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했다.
사진을 발견하고 미네코의
생각을 뒤늦게 알아차린
하즈키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고
그녀의 대답은 그녀답지 않았다.
“이것 또한 그 사람의 일부분이니…”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졌다.
아니 그 모습이
정말 그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진 눈은 인자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코하네는 사진 속의
젊음을 자랑하는
그의 어머니가 궁금하다.
액자를 들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을 찍고 있는 그를
보고 짓는 미소는
정말 사랑스러움이 묻어난다.
하즈키가 짐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그래요?
흑백 사진이 색깔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응?”
“너무 아름다워서.”
하즈키가 피식,
소리를 내며 말한다.
“타다요시는 엄마가
예뻐서 좋아했다고 했어,
그런데 알고 보니
얼굴만큼 모든 게
완벽했지라고...”
“정말 그래 보이는걸요?
두 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도 표정으로 느껴져.”
그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다.
“우리처럼?”
코하네도 그의 볼을
쓸며 미소 지었다.
갈수록 더해지는 더위에
열어 놓은 창문도 소용이 없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복도 끝을 막고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친
바람이 방 안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부딪친다.
그녀의 머리칼이 소용돌이쳤다.
채 묶어 놓지 못한
하얀 커튼이 팔랑거린다.
커튼을 쳐 놓으면
밖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었지만
이젠 그의 방도
그녀의 흔적이 남은 것처럼
하얗게 그녀스러워지고 있는 중이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꽤 오랫동안 잠을 잔
느낌이 들었다.
창문에 떡, 하고 자리 잡은
달이 든든할 정도로 밝다.
형광등을 밝히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했다.
누워있는 곳이 어디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화들짝,
놀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이런 맙소사.”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푹 꺼진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빠르게 머리칼을
질끈 묶고 화장실로 달렸다.
찬물에 얼굴을 맡겨 보지만
쏟아지는 피곤함은
가실 줄을 모른다.
채 닦지 못한 물기를
떨어뜨리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일 층에 내려서자마자
커다란 시계가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음식 냄새와 목소리들이
이끄는 곳으로 조심조심 걸었다.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제일 먼저 하즈키가
그녀를 발견하며
젓가락을 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하네!”
그녀는 머리를 연신 굽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코하네의 머리가 향한 곳은
당연히 미네코가 앉아 있는 자리다.
미네코는 큰 웃음소리를 내며
일어나 그릇을 찾았다.
아마도 그녀의 밥을 챙기려는 모습이다.
“죄송은, 피곤한 게 당연하지.
얼른 자리에 안거라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날 거야.”
코하네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하즈키의 옆자리에 앉는다.
“정말 죄송해요.”
미네코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된장국을
그녀의 앞에 놓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맛있게 먹으렴.”
찬물을 벌컥 들이켜는
마나츠가 말했다.
“우리도 지금 시작했어요.”
이츠키가 눈치 없는 말을 뱉는다.
“코하네씨 기다리다가
배가 얼마나 고픈지, 하하.”
마나츠가 이츠키를 흘기지만
그는 이 이유도 모르는 듯하다.
“네, 죄송해요.”
하즈키와 함께 먹는 밥상에
빠질 리 없는
달걀말이를 미네코는
코하네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아주 불편한 자리는 맡지만,
코하네에게 울타리가 생긴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했다.
코하네는 배가 고팠는지
말할 새 없이
허겁지겁 젓가락을 흔들어 댔다.
그 모습을 본 하즈키는
비어 있는 자신의 밥그릇에
밥을 더해 함께
젓가락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를 위한 배려는 끝도 없다.
식사를 마친 후 코하네는
이제까지 먹어 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며
미네코에게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전했는지 모른다.
달빛에 타다요시가 심어 놓은
녹나무가 더 진한 빛을 뿜으며
팔랑거린다.
하즈키가 결혼하고 난 후부터,
이곳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두 개였던 의자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
미네코가 아끼던 새 그릇이
나와 있다는 것,
어둡던 곳에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미네코는 지나치지 않았다.
하즈키는 잊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 모습이 진짜 그녀인가…’
이츠키가 갖고 온 술은,
들어 보지도 마셔 보지도
않은 것들이 많지만
의심할 것 없이 마셔야 한다.
그만큼 술맛이 기분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술만큼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던 마나츠는
귀한 술을 보고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뱃속의 힘에
대해서 알 리 없을 것이다.
뱃속의 힘을 알고도
술을 포기하지 못했던
미네코가 말했다.
“이상한 말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난 말이야 배가
무거운 마나츠가 부러워.”
마나츠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요? 후후훗.”
“나오코가 지금 뱃속에
있다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거든.”
그들은 더 이상
그녀의 말에 웃을 수가 없었다.
겐토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이럴 때 분위기를 바꿔줄
역할을 할 사람은 이츠키뿐이다.
“에이, 나오코는 똑같을 거라고요 뭐
정말 난 아직도 나오코가 무서워.”
마나츠가 말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눈치 보는 거겠지.”
“아하핫, 내 딸이지만 참…
이츠키가 아주 정확한 얘기를 했어.”
그제야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꽤 시원한 밤바람은
술에 취할 시간도 주지 않는 듯하다.
코하네는 처음 그들의
울타리 속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참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마나츠를 미워하면서
늘 함께 웃고 떠드는 나오코,
하즈키와 결혼 생활까지 한 마나츠,
또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하즈키의 친구 이츠키,
하즈키와 나오코의
뭔지 모를 집착,
그들은 그 울타리 속에서
늘 함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그들이다.
한데 이젠 그들 속에
코하네도 함께
울타리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그녀도 그들 속에
속한 지금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들의 관계 속에는
무엇인지 모를
끈끈함이 배어있고
코하네는 그것들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그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달빛은 점점 더 밝아졌고 동그래진다.
모두가 예전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12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급격하게 피로를 느꼈다.
겐토와 나오코가 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코하네는 낮잠을 잔 덕에
잘 보이지도 않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결혼식부터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빠르게 달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이렇게 소중한 건지,
다시 깨닫는 중이다.
둘은 말 없는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듯해 보인다.
이곳에서 그녀와 함께
녹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
말 다른 인생이 펼쳐진 게 분명하다.
예정대로 그녀는
하즈키의 곁에 있었고,
예정대로 그는 하즈키의 곁에 있다.
사실, 그녀가 섬에 다녀온 후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호의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똑같이 그랬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모든 게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코하네 또한
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랬다면 그들은 지금
서로 곁에 없었을 것이다.
하즈키가 말했다.
“후우, 이제 실감이 나.”
코하네가 그의 얼굴을 올려 본다.
“당신이 동반자라는 거.”
고개를 숙이며 그녀는 미소만 짓는다.
“당신은 안 그래?”
말을 뱉고 나서
갈망하는 자신을 후회하며
재빨리 다른 말로 바꿔버린다.
“들어갈까?”
“피곤하죠?”
“조금.”
“들어가요.”
코하네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덕분에 달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
해가 뜨는 모습도 눈에 담았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잠에서 깨던 그는
오늘따라, 참 잘도 잔다.
그녀는 어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완벽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낡은 계단을 내려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전날 밤 미처 치우지 못했던
그릇들이 개수대에 쌓여 있었다.
이 순간 잠이 들었을 것을
생각하며 미네코의 얼굴을
떠올리자 아차, 싶었다.
“휴우.”
그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그릇을 닦기 시작한다.
미끄러움에 식기를 놓칠세라
손가락에 온 힘을 주며
집중하고 있다.
점점 위로 멀리멀리
날아오르기 시작한 해가
주방 안을 비추었다.
마치 한 여름 늦은
오후의 노을처럼 예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