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거나 긋거나 한 자국

10. 여름 비

by 금봉





장마가 곧 시작될 듯

습한 공기가 떠다닌다.

코하네가 이곳을 오고 난 후부터

비가 계속 내리는 중이다.


출처, 리틀포레스트 여름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네코와 함께

나고야역에 갈 생각이었다.

그곳은 큰 수족관과 유람선을

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미네코가 코하네를 그곳에

데리고 가려는 가장 큰 이유를 설명했다.


“아주 오래된 음식점인데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곳이지.”


비가 바람과 함께 날리듯

내리는 날에 가는 건 무리다.

코하네는 정말 괜찮지만

미네코는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비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날씨는 정말, 어두컴컴,

불을 켜지 않으면 뭔가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다.

하즈키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미네코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냥 따뜻한 국수 드시러 가요.”


미네코가 뜨개질 한

컵 받침을 만지작거리는 코하네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네코는 발갛게 충혈된 눈을

살며시 뜨곤 손을 흔들며 일어섰다.


“으읏차, 아니 아니야,

어제 잠을 통 이루지

못했더니 말이야.”


코하네는 잠시 걸음을 멈추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난 좀 자 둘 게 둘이 다녀와,
덕분에 저녁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는 정말 미네코가 걱정이다.

마나츠의 말로는 부쩍,

쇠약해진 모습에

음식을 먹는 양도 줄었고,

꼭, 한 달에 한 번

며칠은 그렇게 기운이 빠진 채

잠만 청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행인 건

그렇게 며칠, 쉬고 나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으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간다.

코하네가 그녀의

안색을 보며 말했다.


“네 쉬는 게 낫겠어요.”


“그래 그래, 혼자 들어가마."


그녀는 또 두 번씩

같은 단어를 반복한다.

코하네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았다.

미네코의 방문이

닫히는 시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즈키의 숨이 길어진다.


“후우.”


코하네가 텔레비전의

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좀, 주무시면 좋아지실 거예요.”


“응.”


그는 뭔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말을 얼버무린다.


“코하네, 저기.”


“으응.”


“저기, 당신이 말하지 않아서,
나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그곳에
가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힘이 들어가 있다.


“가고 싶지 않아요.”


하즈키는 기차를 타기 전부터,

그녀의 가족들이

함께 머물렀던 집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듣지 않은 이상,

먼저 꺼내기가 힘든 말이었다.

아키라가 죽고 난 후부터

가족 얘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그녀다.

이상할 정도로 그 이야기에

관해서는 하즈키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아,

그는 내심 서운하거나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때론 의심하기도 했다.


“응, 그래.”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하즈키.”


“고맙긴.”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 때

내가 먼저 말할게요.”


“응 그래.”


그녀와의 사이에

백 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벽을 어떻게 하면

뚫을 수 있을지

그는 늘 고민이다.

한때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면 된다,

생각해 보지만

그녀가 섬에 다녀온 이후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은 자꾸 그를

재촉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아주 좋은 생각이

낫다는 것처럼

표정을 환하게 바꾸며 말했다.


“둘이 다녀오자.”


“국숫집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그래요,

나 시간 좀 줄래요?”


“그럼.”


그녀는 빠르게

주방으로 달려가더니,

미네코의 잠이 깨지 않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냉장고를 뒤적인다.

미네코를 위해

먹기 쉽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간단하게

차려내고 싶었다.


미네코는 정말

깊은 잠에 빠졌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맺힐

정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어깨까지 올린 채

잠이 들었다.

하즈키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미네코를

깨우기를 포기한 채

밖을 나선다.


『일어나시면 꼭 저녁 챙기세요,

다녀오겠습니다.』


하즈키는 그녀의

짧은 메시지가 담긴

쪽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밖을 나오자마자

습한 바람이 불어닥친다.

그 바람마저 시원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휘날리는 것을 보니,

듬성듬성했던 도토리 모양의

머리통이 생각났다.

시간은 참 숨 쉴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녀가 바람을 뒤로

거꾸로 걸어가며

앞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말했다.


“여섯 시가 되었는데

아직 해가 멀쩡해요.”


“응.”


“버스 탈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을 탄 머리칼이

얼굴 전체를 휘감았다.

그의 내민 손을 잡을 듯하더니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로 작은 발로 내는

속도는 대단히 빠르다.


“뭐야, 코하네.”


뒤따르는 그에게 소리친다.


“정류장까지예요.”


“내기하자는 거야?”


“뛰기나 하라고요.”


그는 봐줄 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빠르게 지나치는 듯하더니,
어느새 그녀와

나란히 뛰는 중이다.

그녀의 숨이 가빠지고

작은 눈이 더 작아지며

행복이 눈 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있겠냐, 라며

치졸한 자신을 탓한다.


그녀의 달리기는 정말, 제대로다.

여느 여자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나란히 도착한 정류장까지,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는 그녀보다

숨이 차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을 기대며 헉헉거린다.


“하악 하악 하악.”


그녀는 숨만 조금 급할 뿐,

지치지 않은 기색이다.


“힘들어요?”


“후우, 당신 이렇게

잘 뛰는지 몰랐어, 하악.”


“학교 갈 때 올 때

하루도 빠짐없이 뛰었어요.”


“응?”


“으응, 정말.”


해는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자각할 겨를 없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국숫집은 변함없이

낡고 희끗거렸다.

코하네는 그곳을 발견하자마자

발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한다.

등이 켜져 있는 걸 보니

그곳은 참 여전했다.

하즈키가 말했다.


“자, 들어갈까?”


“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자마자 눈에 띄는 건

밝은 형광등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늘 반겨주던 아주머니를 찾았다.

그는 겁이 났다.

오랜만에 걸음이라

어쩌면 그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코하네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봐.”


그는 일어나 주방 안쪽을

기웃거리며 나무 판에 대고

똑똑, 소리를 낸다.

작은 아이가 드나들 정도의

좁은 문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린

아주머니가 허리를 굽히며 나왔다.


주인장은 버릇처럼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얼굴에 미소부터 지었다.


가슴에 달린 안경을

주섬주섬 코끝에 걸치며

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손뼉을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의 행동은

얼마나 반가운 건지,

말소리를 낼 수 없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수화를 제법 할 줄 아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추억에 잠기게 된다.


코하네도 일어나

아주머니에게 인사한다.

하즈키는 코하네와의 사이를

얘기라도 했는지

주인장은 또다시

손뼉을 치며 알아보지도,

듣지도 못한 손가락으로

모양을 만들며 지휘자처럼 휘날렸다.

수화에 능통한 그가

아주머니의 행동을 해석한다.


“우리, 축하한다고 하셔.”


그녀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주인장은 그들을

자리에 앉히며

그와 다시 대화를 나눈다.


“당신 시원한 거 먹을 거지?”


“응, 네.”


아주머니는 한달음에

보리차를 전하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곳의 보리차는

날씨와 관계없이

여전히 따뜻하고 구수하다.


“음, 맛있어요.”


그는 땀을 흘리며 설마,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부채질한다.

이곳은 그 흔한 에어컨도 없다.

선풍기 두 대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도 돌아간다.

가게 안의 공기는

해가 져도 뜨끈뜨끈했다.

아주머니가 급하게 만들어 온

국수를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맛있는 음식이다.

그들은 단 한 번의 목소리도

내지 않고 후루륵, 캬, 하는

소리만 남발한다.

원래 먹는 양이 적은

그들은 그릇에 뭔가 하나

남지 않도록 깨끗이 비워냈다.

빈 그릇을 기울이며

서로의 그릇을 확인시켜

주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머니의 웃음도 빠지지 않는다.

그가 아주머니에게 덥지 않냐,라는

말을 물어봤을 때

대답이 참, 재밌다.


“덥지 않으면

냉국수를 찾지 않을 거야.”


역시 주인장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진 후,

제법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코하네는 한 손 가득 있는

사탕을 원피스 주머니에 넣었다.

아주머니의 사탕 친절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원피스의 한쪽 주머니가

축, 쳐진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그들이 뒤를 돌아본 순간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어 줄 것이 뻔했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본 후,

인사를 나눈다.


시간이 흘러도

자연의 변함을

사람들은 잘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다.

젊음의 반을 보냈던 곳도

여전히 같았다.

늙은 나무의 껍질은

굉장히 도드라지고

마른 장작 같았지만,

그만의 묵직함은

더욱 단단해진 모습이다.

역시 여름의 짙은 녹색은

해가 진 후에도 빛을 발한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콧속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늙은 나무를 올려 보니

나오코가 떠올랐다.


“그 나무는 좀 특별해.”


“왜?”


“하즈키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거든.”


나오코는 늘 그를

특별한 사람, 또는

그의 곁에 있었던

모든 장소와 물건들은

그 때문에 특별해,라는

식의 말을 자주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 불편한

마음이 조금 드러났지만,

그런 기억이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늘

그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의 거리가 멀다고

느끼기 시작한 게 아마

그때부터 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에는 따뜻한 녹차,

그리고 맥주가 들어있었다.


“자, 혹시 몰라서

따뜻한 것도 넣었어.”


“고마워요.”


하즈키는 녹차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또 고마워요.”


그가 웃었다.

그는 다시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내는 트림 소리는

그녀를 웃게 한다.


“크어억, 꺽.”


여간해서 하지 않던 행동을

그는 일부러 더

크게 하는 듯하다.

더운 열기를 식히러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있었다.

가족끼리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출처, 리틀포레스트


“당신이 내 옆에 이렇게 있다니,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야.”


“나도 그래요.”


“당신은 행복해?”


“질문이 이상해요, 하즈키.”


“하하, 그런가?”


“당신은 행복해요?”


“그럼. 정말 행복해.”


코하네가 입꼬리를 올리며

함박웃음 짓는다.


“당신 혹시 알고 있었지?”


“으응?”


“마네키 네코 말이야.”


“나와 닮았다고요?

나오코에게 들었어요.”


“그래?”


“나오코는 모르는 게 없어요.”


하즈키는 잠시

땅을 내려보았다.


“당신은 날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저 국숫집?”


“음, 꼭 말해야 해요? 흣.”


그도 따라 피식거린다.


“꼭 말해줘야 해.”


“나오코를 데리러

학교에 왔을 때,

음, 그때 겐토 씨도 있었어요

후후, 겐토 씨는 참,

그때도 재밌어 보였어요.”


하즈키는 적잖이 놀란 눈치다.


“와, 그때 나를?”


걸음마를 막 뗀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그의 얼굴을 올려 본다.


“응? 왜 이렇게 놀라요?”


“어, 어 놀랐어. 정말.”


“난 그땐 눈에 띄면

안 되는 아이였는데,
당신, 그리고 나오코,

그리고 겐토 씨 마저
눈에 띄게 빛이 났어요,

안 볼 수가 없었어,
모두가 그랬을 것 같아요

나야말로 당신과

함께 있는 지금이 신기해요

그때 그 순간

사람들이 지금 나의

울타리 속 사람들이 될 줄은.”


하즈키가 그녀의 손을 꼭 잡는다.


“이렇게 하면 좀 실감이 나.”


“흣.”


“난 그때 당신을

처음 보고 난 후부터,
부끄럽지만 당신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


코하네가 장난기 있는

눈으로 그를 의심하는

듯이 입을 쭉 내밀었다.


“정말이야, 그래서 내방엔

늘 마네키가 있었던 거고.”


“네?”


“응, 정말이야.”


그는 아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 노신사분이

당신을 데려간 후부터,

쭉 보지 못했었지,
그러다 우연히

국숫집에서 당신을 마주한 거야.”


“아… 아키라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정말 놀랐어,

놓치기 싫었는데,

또 놓치고 말았지. 하하.”


“나도 그때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날 또렷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봤어요,

그때 나도 그랬던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하즈키가 말을 꺼내며

정말 큰소리로 웃는다.


“으핫, 그때 마호 씨가

당황하던 모습도 기억나는군.”


“하, 그랬어요?”


코하네가 섬에 다녀온 후,

처음 꺼낸 마호의 이야기다.


“그 친구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그녀는 마치 마호를

곁에서 보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마호는 잘 지낼 거예요.”


하즈키는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또 꺼냈다.


“연락은 하는 거야?”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호는… 잘 있어요.”


더 이상 그는

마호에 대해 말을 잇지 않았다.


“응, 그래.”


아주 미세한 입자를

이루고 있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갑자기 습한 공기가

스며들어 한기를 느낀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응, 들어 가자.”


“다시 달리기 어때요?”


“에이, 거리도 짧아.”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냅다 뛰어 버린다.


“으악, 하즈키이이 치사해요.”


코하네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도 깜박한 것처럼

다리를 쭉쭉, 펴내며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그는

집 앞 가로등 밑에서

헉헉대고 있었다.

그녀의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이건 무효.”


그가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하더니

그의 품에 와락, 안긴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진다.


텔레비전 소리를

얼마나 크게 해 놓았는지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리가 울렸다.

그들이 집 안에 들어와서

움직이는 모습을 본 후

미네코는 그때야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안쓰럽다.


“아, 깜짝이야.”


하즈키가 말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응, 그럼 그럼.”


미네코는 요즘 들어

이 시간에 빼놓지 않고 보는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

코하네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널브러져 있는 것들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뜬다.

하즈키도 덩달아 놀라는 눈치다.

코하네가 손가락으로

조용히,라는 시늉을 한다.


“쉿.”


그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미네코 답지 않은 모습에

많이 놀란 기색이다.

미네코의 성격이 많이 변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무던한 건 의아했다.

먹던 그릇 하나라도

상 위에 있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미네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는 적응이 안 된다.


“당신은 먼저 올라가요.”


“아니야.”


“쉿, 올라가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길 생각 없이 곧장 계단을 향한다.

코하네는 미네코가

저녁을 챙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콧소리를 내며

널브러진 것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웃음소리와 미네코의 호호거리는

웃음소리가 참, 듣기가 좋다.

그녀도 따라 이유 없이

웃음이 나온다.


하즈키가 끙끙거리면서 사 온,

귀한 수박을 자를 작정이다.

워낙 큰 크기를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코하네의 힘으로는

칼이 말을 듣질 않는다.

요리조리 칼집을 내 보지만

영락없이 상처만 내고 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칼을 바닥으로 누르듯,

두 팔로 밀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박 두 덩어리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큰 텔레비전 소리에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미네코가 한달음에

주방으로 달려왔다.


미네코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무 움직임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중이다.


칼 끝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코하네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두 팔을 접어 올리고 서 있었다.

코하네의 손끝으로

붉은 액체가 바닥으로

점점 더 빠르게 뚝뚝,

흐르고 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미네코는

서둘러 수건을 챙겨

코하네의 손을 칭칭 감으며

하즈키에게 들리도록

비명 섞인 목소리를 내지른다.


“히다아, 히다 히다 하즈키이이.”


세수하다 말고

불길함을 느낀 그는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보였음에도

코하네는 얼음처럼 얼어붙어

눈동자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하즈키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 맙소사.”


미네코가 말했다.


“병원, 병원.”


그는 감긴 수건을

더욱 세게 누르며

칭칭 감고 또 감았다.


“코하네, 이거 놓으면 안 돼,

응? 꼭 잡고 있어 응?”


하즈키는 코하네를

가볍게 업고

미네코에게 말했다.


“저만 가요, 전화할게요,

계세요.”


미네코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끄덕인다.

그는 정말 미친 듯 뛰었다.

정말이지 무게가 나가지 않은

그녀는 업고 있는 느낌도

들지 않게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큰길에는

택시들이 줄지었고

빠른 시간에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코하네는 간호사들을

확인하고 나니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그때가 되고 보니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칭칭 감은 수건을

놓자마자 얼굴을 찡긋거린다.

하즈키는 계속 아,라는

소리만 반복하면서

코하네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잠시 후 의사라는 사람이

오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어떻게 칼에 베인 건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코하네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어, 그… 수박을 자르려고…
칼을 손바닥으로

누르다 미끄러진 것 같아요,

칼끝을 타고 내려갔어요.”


“아, 잘 알겠습니다

상태로 보니
다행히 손등을

관통하진 않았습니다.

꿰매는 게 우선입니다.”


의사는 관통한다는 말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잘도 말한다.

그 말에 놀란 하즈키가

벌건 얼굴로 물었다.


“꿰매면 괜찮은 건가요?”


의사는 여자 간호사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지혈 먼저 하겠습니다.”


지혈을 맡은 여자 간호사는

갓 사회에 나온 것처럼

어려 보였다.

간호사는 통증을 점점 더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코하네 보다 더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이다.

코하네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그녀에게 말했다.


“통증, 잘 참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아, 네 참기 힘드시면

꼭 말씀하세요.”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하즈키에게 기댄다.

그는 간호사의 손이

그녀의 상처를 지나갈 때마다

미간을 좁히며 안타까워했다.


“하아…”


“하즈키, 괜찮아요.”


“괜찮긴, 이게 괜찮아?”


코하네는 이 상황에 웃음이다.


“홋, 아니 나 말고 당신이요.”


여자 간호사는 그녀의 말에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한다.


“흐업.”


하즈키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코하네 덕분에 여자 간호사는

안정을 찾았는지 더 이상

손을 떨지 않았다.


코하네는 조금 찾은 여유에

홀로 남은 미네코를 걱정했다.


마치 강한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미네코는

멀뚱히 서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 남편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보다,

나오코가 죽은 쥐꼬리를

가방에 숨겨 놓은 것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충격받은 모양이다.


바닥은 수박의 붉은

알맹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게 대체 코하네의 피는

아닌지 의심스럽고 공포스럽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끔찍하게 뾰족한 칼을 집어

개수대로 던져버렸다.

수돗물을 틀어 붉은 자국이

흘러가도록 끊임없이 흘러 보낸다.

그녀는 다시 바닥을 내려보며

도저히 맨손으로는

치울 자신이 없었는지

평소 잘 끼지도 않는

고무장갑을 끼고

붉은 알맹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간혹 더 진한 붉은 기가 도는 곳은

쇠를 박박 긁어야

나는 냄새가 진동했다.

피를 많이 흘린 코하네가 걱정이다.


“쯧쯧,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전화기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전화기를 들었나 놨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게 불운한 자신의

탓인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드디어 기다리는 전화벨이 울렸다.


“따릉.”


그녀는 첫소리가

나자마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아인? 괜찮은 거니?”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미네코의 목소리는

숨이 가빴고 떨렸다.


“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 정말 다행이야

말 다행이야.

혹시 걱정해야 될 부분이

있는 건 아니고?”


그는 보이지도 않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상처는 꿰맸어요,

아무 지장 없을 거라고 해요.”


“그래 그래.”


“많이 놀라셨다고,

코하네가 걱정이에요.”


“무슨 나를 걱정해, 됐다

얼른 조심해서 오기나 해.”


“네, 집에서 뵈어요.”


하즈키는 기분이 이상했다.

꼭 타다요시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와 했던 대화처럼

미네코와 그렇게 지내고 있다니,

낯선, 이란 단어는

이제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맞는 듯하다.

미네코는 이제야

등을 의자에 편히 기대어 본다.


“하하 아아… 다행이야, 다행.”


그들이 계획한 날짜보다

오래 그녀가 실밥을 푸는

날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미네코는 그녀가 주방에서

기웃거리기만 해도

호통을 쳤고 식사 때마다

따뜻한 밥과 정성

깃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츠키노가 차려 준

밥상처럼 따뜻했다.


실밥을 풀고 난 다음 날은

미네코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유람선을 탔고

오래된 음식점을 방문했다.

코하네는 정말 이제껏

먹어 보지 못한 맛이라며

칭찬이 끝이 없었다.

그 후로 그곳은 미네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미네코와 함께 들르는 곳이 되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미네코와 쌓은 정은

하즈키와 처음 이 집에서

함께 살았던 세월 동안의

정보다도 더욱 끈끈한 모양이다.


그는 기차역까지는

무리라며 미네코를 말렸지만

미네코의 고집은 단번에

꺾일 고집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결국 기차역에서

그들이 탄 기차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미네코는 손을 내리지 않았고

고개를 떨구지 않았고,

등을 보이지 않았다.


하즈키가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미네코에게 건 전화다.

코하네가 한마디라도

거들었거나 절대 억지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그다음 방문 때부터

그녀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어머니, 란 단어를 붙여 쓰곤 했다.

처음 어머니란 말을 뱄을 땐,

미네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지만,

두 번 세 번의 반복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단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한 날들을 만끽하고 있었고

또한 꿈꿀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행복을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그 평범함이

새어 나가지 않게 꼭 꼭,

걸어 잠그길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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