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검은콩 자국

8. 쓸쓸함에 대하여

by 금봉




하필이면 코하네가

사라지고 없는 날,

직장을 나가지 않는다.

정말 의미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홀로 보내는 휴일은

왜 그렇게 시간이 흐르지 않는지,

잠을 자도 시곗바늘이

멈춰 있는 것 같다.

코하네 없이 반나절을 보내며

그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사실 코하네와 함께

공항에 가는 내내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하즈키는 이 순간에도

자신에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코하네가 그 섬에 간지

겨우 삼 일이 흘렀다.

코하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지,

열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작은 상자 안에 갇혀

모래사장 위로 버려진 것처럼

목이 타들어 갔다.


하즈키는 코하네 또한

잠을 이루지 못해

밤새 불안감을 안고 있을 거라

느끼며 전화기 숫자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코하네와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만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그녀를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고 싶었다.

소리 없는 전화기가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중이다.

갑자기 크게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넋이 나간

하즈키의 넋이 돌아오며

화들짝 놀란다.


“쾅쾅쾅.”


대체 문을 발로 두드리는 건지,

주먹으로 때리는 건지 알 수 없다.

현관문 넘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즈 키이.”


하즈키는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아.”


“쾅쾅쾅쾅.”


“문 열려 있다.”


둔탁한 소리의 주인공 겐토가

빠르게 문고리를 비튼다.

겐토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으, 며칠 동안

술만 먹은 거야?

아, 술 냄새.”


겐토는 냉장고 문을

먼저 열어 며칠 전 나오코가

챙겨준 플라스틱 통을 만지작거렸다.


“이것 봐, 그대로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즈키는 여전히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한다.


“다음엔 없는 척할 수도 있어.”


“입, 닫는다.”


하즈키가 피식거린다.


“웬일이야?

연락 좀 하고 와라.”


“네가 갈 데가 어디 있겠냐,

그녀도 안 계시는데 말이야.”


“참, 너희는 소식이 빠르다.”


“부부가 비밀이 있냐?”


하즈키가 먹다 남은 맥주를

끝까지 들이켠다.

멀쩡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며

정상임을 다시 확인했다.


“하, 너 이럴 것을

왜 보낸 거야?

내가 너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이네.”


“거긴, 마호 씨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아마 네 생각할 겨를도

없을 거다.”


하즈키의 얼굴이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나가자, 방구석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전화를 못 받으면

코하네가 걱정할 거야.”


“꼭 예전 마나츠 보는 거 같다.”


줄곧, 전화기에 집중하던 하즈키가

겐토의 말에 쉽게

집중력이 흐려진다.

손을 하늘 위로, 뻗어

겐토의 뒤통수에 내리치려던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의 소리가

길게 뻗어 나가기도 전에

전화기를 낚아챈다.

하즈키의 숨까지도 가쁘다.


“코하네?”


하즈키에게 뒤통수를 내줄 생각이던

겐토 또한 소리에 놀란 눈치다.

겐토 마저 숨을 죽이며

작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모양이다.

하즈키의 얼굴이

잠시 환해지더니,

금세 죄지은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들은 몇 마디 나누지도 않더니,

간단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니, 코하네가

끊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겐토는 하즈키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할 일도 아닌 일에 머뭇거렸다.

하즈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가자, 뭐 좀 먹어야겠어.”


하즈키는 아직은 찬

밤공기가 두렵지도 않은 지,

반팔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선다.

무엇인가, 단단히 넋이 나가 있었다.

겐토는 친절을 베풀며

하즈키의 카디건을 챙겨

뒤를 따랐다.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겐토가 묵묵하게 겉옷을 건넨다.

하즈키도 역시 묵묵히

받아 들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문두스” 다.


하즈키의 눈은 마치

붉은빛이 쏟아져

내릴 정도로 힘을 주어

깜박거리고 있었다.

겐토도 놀란 눈치다.

겐토가 말했다.


“뭐야?”


“어?”


“왜 놀라서 그래?

안 들어가?”


하즈키가 굉장히 실망한

얼굴을 하며 피식거렸다.

코하네도 마호도 없는 이 순간에

그는 질투심으로

눈이 멀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하즈키의 마음을 눈치챈

겐토가 먼저

문두스에 발을 디뎠다.


이곳은 근래 잘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움이 남다르다.

입구에 깔아 놓은 웰컴, 이라고

적힌 붉은색 발판에

발을 올려도 되는지,

잠시 고민하게 만드는 분위기이다.


형광등이라고 찾아볼 수 없이

동그랗고 오렌지빛을

뿜어내는 조명이 수도 없이 많다.

입구 복도를 구경하기도 전에

붉은색 조끼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마치 기모노라도 걸친 듯

폭이 좁은 스커트를 입고

종종걸음을 걸으며

다가오는 여자가

그들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여자는 한 번도 입꼬리의 끝이

평행선을 만들지 않고

화살처럼 구부러진 채 말했다.

겐토는 이런 곳을 아주 자주,

다녀 본 사람처럼 여유를 부렸다.

생각해 보니,

최고의 직장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다녀봤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예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호씨 소개로 들렀습니다.”


겐토의 말에

마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종종걸음의 여자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꽤 멋을 부린 겐토에 비해,

하즈키는 헐렁한 운동복 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행색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걸어왔나,

한심할 뿐이다.

겐토가 하즈키를 보며

들어오라며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의 안내로 앉은자리는 2층이고,

밖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를 보니

마호의 주머니 사정이

가늠되지 않았다.

2층에는 두 좌석에 손님이 있었고,

모두 연인 사이인지

젓가락 하나 그릇에 닿는 소리도

내지 않고 숨죽이며 음식을 먹는다.


겐토가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음식보다 더 값이 나갈 것 같은

그릇들이 눈에 띈다.

코하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배고픔을 알아차린 하즈키는

체면도 버리고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을 걷는 여자와

덩치 좋은 남자가 사라지고

나자마자 하즈키는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음식점이라 해도

어쨌든 된장국은 빠지지 않는다.

겐토는 말없이 게걸스럽게

된장국을 후루룩, 쩝쩝, 거리며 먹는

하즈키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좀, 천천히 먹어 어?”


하즈키는 대답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쩝쩝거리는 소리만 낼뿐이다.

종종걸음의 여자가

하즈키를 보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그릇들은

아주 깨끗하다.

하즈키가 여자에게 손짓한다.


“여기요 맥주 주세요.”


겐토가 자신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자존심 다 버렸네.”


하즈키가 밖을 보며 대답했다.


“이 꼴로 들어온 순간부터

버렸지 후훗.”


“대체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가 예전 마나츠 같다며?

그러니 코하네,

그 사람에 따라 돌아가겠지.”


“하, 못 봐주겠다, 너”


하즈키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나도 그러는 중이다.”


다른 자리의 사람들이

보지 않은 척하며

곁눈질로 눈치를 주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거야말로 다행이다 쯧.”


여자가 가져온 생맥주를

하즈키는 숨도 쉬지 않고

한숨에 들이켜며

잔을 내려놓자마자, 외쳤다.


“여기, 하나 더 부탁해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역시 입꼬리는

화살 모양 그대로이다.


마호라는 주인 녀석이 꽤,

혹독하게 직원 교육을

시킨 모양이다.

하즈키는 그답지 않게

눈에 보이는 문두스의 모든 것들을

삐뚤게 보고 있었다.


“사람에게 직감이란

능력이 있는 게 싫어,
그게 맞지도 않으면서

사실도 아니면서 믿는 거지,
한심하기 짝이 없지.”


겐토가 반문했다.


“나도 네 그 말에

직감한다 네가 왜 그러는지,
근데 지금 내 직감은

사실이겠지?”


하즈키가 겐토를 향해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위로하려면 제대로 해,

나쁜 자식.”


겐토가 테이블 위 김 과자를

겐토에게 집어던진다.

순식간에 주변에 과자가

한 주먹이다.

종종걸음의 여자가

웃는 인형처럼 다가와 말했다.


“실례합니다,

사장님이 오늘 자리를 비워서
제대로 대접을 못 해 드렸다고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마호는 저녁쯤,

그들에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하즈키의 갑작스러운 문두스의

방문 이유를 내심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값을 치르지 말라는 말은

남기지 않았다.

분명 그 자리에 있는

하즈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는 건,

코하네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도 되기 때문이다.


“네, 고맙습니다.”


“혹시 차를 원하시면

두 분께 드리고 싶은...”


웃는 인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즈키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린 이만 나갑니다.”


겐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 그럴 생각이 없어,라고

말하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안내해 드릴까요?”


하즈키는 대답도 귀찮은 듯

고개만 까딱거린다.

겐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하즈키가 겐토의 등에 대고

말하며 사라진다.


“잘 먹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하즈키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가 나왔다.

고민하는 척, 하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담배를 피우는 버릇이 없는

그에게 라이터는 행방불명이다.


겐토가 지갑을

구겨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는 인형의 여자는

허리를 굽힌 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겐토가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면

여자는 그때에도

허리를 펴지 않은 채

굳어 있는 인형처럼 인사하고 있었다.


불편함에 그들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드디어 골목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하즈키가 먼저 숨을 크게 내쉬며

당당하게 뒤를 돌아본다.


“와, 정말.”


겐토가 고개를 저으며

저녁값 영수증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 봐, 그럼 당연한 거라 생각될 거야.”


하즈키는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질겅거리며

영수증을 바스락거린다.


“억, 뭐야? 와.”


“금값이야, 마호 녀석 대단하네.”


“미안, 이건 내가 줄게.”


“짜식, 그 소리가 아니야.”


“내가 불편해”


겐토는 괜히 라이터를 들이민다.


“자, 피울 거야?”


하즈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씹다 만 담배를 구겨버리며 말했다.


“아니.”


“마호와 류 사이는

너라도 침범하기 힘들 거 같다 안 그래?
참 이상하지만,

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네 말처럼 그게 오해라면

다행인 거지.”


하즈키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입술을 깨물며 다른 소리에

집중하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

이렇게 옷을 입고,

슬리퍼를 끌면,
정말 막사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뭣?”


“아주 편하다는 뜻.”


“쳇, 좋네.”


하즈키는 슬리퍼를

더욱 심하게 질질 끌었다.


“가자, 내가 산다.”


“좋다, 나오코에게

미리 전화해 둬야겠어.”


하즈키는 겐토의 말이

언제 집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소리로 들렸다.

나오코가 팔짱을 끼며

인상을 구기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겐토가 측은하다.


아직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여름을 준비하기 전 날씨는

그곳의 국수가 부쩍, 생각난다.

마치 그곳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머니의 따뜻한 보리차 냄새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하즈키는 오늘의 마지막 시간은 꼭,

따뜻한 국수를 먹고 들어가자며

홀로 중얼거리는 중이다.


봄비인지 모를 비가

이틀 내내 시커먼 하늘을 몰고 와

쉴 새 없이 내리는 중이다.

습함이 제법 끈적거릴 준비를 하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코하네가 집을 비운 동안

하즈키는 열심히 꽃을

날랐던 모양이다.

코하네의 입이 오므라지며

중얼거렸다.


“마호처럼.”


백합 향이 온 집안을 뒤덮었다.

마호의 손길에 집 안은

늘 백합의 향기가 남아

향을 느낄 수 없었을 정도로 익숙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익숙한 향기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도쿄에 도착 후,

마중을 나온 하즈키는

코하네의 집에 함께 들어올 수 없었다.

그들은 무언으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이라도 하듯,

서로의 눈동자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즈키는 꼭,

마호와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코하네를 이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새까만 얼굴, 잘 어울려.”


코하네는 웃음으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쉬어, 코하네.”


하즈키의 손은 잠시 방황하는 듯하더니,

빠르게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코하네는 자신을 배려하려,

발을 옮기는 하즈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마침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하즈키의 포기는 굉장히 빠르다.


“연락할 게, 쉬어.”


코하네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며

무슨 정신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는지,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코하네는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숫자를 세어가며 잠에만 취해 있었다.

사라진 기억 속에

하즈키가 조각으로 남아있는 건,

꽃을 들고 들어와,

인사도 없이 다시 사라진 것뿐이다.

오늘도 백합은 정말 싱그러워 보인다.


“그곳도 비가 오겠지.”


4월부터 쭉,

비가 내린다는 마호의 말이 생각났다.

천장 위를 바라보니,

마치 그곳의 별들이

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코하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형광등을 켜고 커튼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딘가 숨어있는 태양이 원망스럽다.


며칠 확인하지 않은

응답기를 빤히 바라보며

숨을 내쉬며 다시 중얼거린다.


“없을까…”


마호의 목소리가 숨어있을,

혹여 없을, 응답기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코하네는 확인 버튼을 누르며

눈도 함께 질끈 감았다.


“여긴 비가 와,

더 쏟아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거야,
음, 아마 한창 더울 때는,

문두스에 있겠지,
에어컨이 있으니까… 하하.”


마호의 웃음소리가

귀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았다.


“따뜻한 그날엔 못 가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
예쁜 코하네겠지

걱정하지 말자,

그리고 그때 문두스에서 봐.”


코하네의 입술이

나지막이 웃고 있다.

마호는 아마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섬에서 떠나올 때부터

내심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현실을

아주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을 보며

마호가 말했다.


“네가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그 걱정은 하고 싶지 않아

난, 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그때 그 말 그대로의 해석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즈키가 꽂아 둔 백합을 보니

마호의 말뜻이

더욱 깊이 와닿았다.

응답기에서 반가운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코하네, 나야 나오코.

잘 지내는 거야?
혹시 까만 콩이 돼서

돌아온 건 아니겠지?

궁금해, 연락해.”


이번엔 제대로 웃음을 뱉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비가 들이닥치지 않을 정도로

창문을 열어 놓았다.

백합이 담긴 길쭉한 유리병을

창문 틈새에 놓으며

잠시 잊은 하즈키를 떠올린다.

코하네는 급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직.”


하즈키가 오려면 아직 이른 시간이다.

코하네의 행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대충 비옷을 걸치고 장화를 신었다.

어깨에 짊어진 배낭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잦아들긴 했지만 비와 함께

불고 있는 바람 덕에

나뭇잎을 적신 비가

코하네에게 모두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으으.”


비 때문인지 웬일로

늘 북적이는 상점이 텅텅 비어 있었다.

옷 끝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뚝뚝, 바닥에 흩어진다.

그대로 상점 안으로 들어가기가

미안했는지,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마치 발레를 하는 것처럼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나름 멀쩡하다.

코하네는 무뚝뚝한

상점 주인에게 어김없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인은 미간을 좁히며

다 떨어진 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닦고 들어가.”


“네, 고맙습니다.”


코하네는 제대로 닦아도

비옷 끝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주인이 수건을 낚아채며 말했다.


“괜찮으니, 들어가.”


하얀 비옷을 입은 코하네가

우스꽝스러웠는지,

주인의 입은 웃고 있었다.


“네, 실례합니다.”


코하네는 마호의 말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꼭,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심장이 아팠던 그때처럼

하즈키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조리 바구니 안에 담았다.

커다란 배낭 안에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의 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엇이 더 모자랄까,라는

생각을 하며

식품이 놓인 쪽을

똑같은 자세로 계속 맴돌았다.

옆에서 마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무거워.”


그녀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두어 번 끄덕거린다.

마호의 말 대로

커다란 배낭이 꽉 차,

무게가 꽤 나간다.

상점 주인이 밖을 향해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비가 그쳤네,

자 그 옷 비닐에 넣어 가.”


“아, 네 감사합니다.”


코하네는 물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비옷을 접어

비닐 안에 넣었다.


다행히 꽉 찬, 배낭 안은

작은 비닐이 들어갈 공간은 있었다.

상점 주인은 배낭을 짊어진

코하네의 어깨가

뒤로 처진 것을 보더니

또 한마다 거들었다.


“쯧쯧, 괜찮겠어?”


“네?”


주인이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 말이야.”


“아, 네네 그럼 요,

힛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거짓말처럼 숨어있던 해가

그녀를 비춘다.

눈부실 정도로 쨍한 볕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순수한 하늘색,

그 밑을 날아다니는 하늘에

점을 만드는

검은 까마귀가 정말 미울 정도다.


날씨가 제법 땀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내린 비가 들어가

생각하지 못했던 장화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꽤 미끌거렸다.

겨우 계단을 오른다.

발은 미끄럽고 어깨는 천근만근이다.


“휴우, 됐다.”


배낭 안에 담긴 것을

탁자에 쏟아 놓고,

가만 생각해 보니

하즈키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말해야 할지,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말해야 할지 분간이 안 된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하즈키가 방문할 시간이

훨씬 넘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다.

느려터진 자기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다.


얼마 만에 비좁고

주방이라고 말하기 힘든 곳에서

음식을 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색한 칼질로 채소를 썰고,

조미료가 담긴 통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간을 맞추어 본다.


대체 그가 좋아하는 달걀말이는

나오코가 한 것처럼

잘 말아지지 않고

통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애써 말아 놓은 것을

접시에 옮기다

두 동강이 난 것을 보니,

억지웃음이 절로 나왔다.


“후회하지 말자.”


다시 또 마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몇 되지 않은 주방 기구를

깨끗이 씻고,

하즈키의 젓가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맥주 컵도 잊지 않고

올려놓는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코하네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기겁한다.


“으억.”


준비도 없이 급하게

대충 옷만 걸쳐 입고

밖을 나선 게

지금 기억 난 모양이다.

제법 길어진 머리칼은

부스스하지 않을 정도로,

몇 갈래가 날 정도로,

떡이 져 있었고,

얼굴은 정말 나오코가 말한 것처럼

까만 콩처럼 보였다.


급하게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틀어 올렸다.

군데군데 나온 잔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간질인다.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잠결에 보이던 하즈키의 모습이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기분 나쁜 까마귀의

울음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출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어둠이 깔린다.

하나씩 켜지는 가로등 불빛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코하네가 유리창을 통해

온전히 비추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많은 일들을 겪는 것처럼,

생각하는 뇌도 똑같이 담아낸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생각들은

그녀를 가끔 지치게 했다.


혼자,라는 단어는

이제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섬을 다녀온 이후,

마호는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혼자가 아님을 증명해 줄

하즈키도 나타나질 않았다.

식어 빠진 음식은

맛을 보지 않아도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코하네는 하즈키의 집을

떠올리며 엉덩이를 들썩이길

몇 번, 끝내 겉옷을 벗고

식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따릉 따릉.”


걱정되는 마음과는 반대로

코하네의 행동은 역시 느리다.


“따릉 따릉.”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 듣고만 있는

그녀의 버릇은 여전했다.

기어코 상대방의 목소리가

먼저 불쑥 튀어나온다.


“나야.”


“안녕 나오코.”


“집에 있었네?”


“응.”


“잘 다녀왔구나?”


“응.”


나오코 주변에서

쇼의 웃는 소리와

겐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부럽고 듣기 좋은 소리다.


“난 하즈키랑

같이 올 줄 알았어.”


코하네는 한참을 생각했다.


“집에 있는데 함께 오지 그랬어?

쇼가 보고 싶어 해.”


“쇼 그새 또 컸겠다.”


하즈키는 휴일에도

오전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하즈키는 오늘은

그들의 집에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혼자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코하네,

지금이라도 오지 그래?”


코하네를 고개를 젓고 말했다.


“으응, 아니야 괜찮아.”


“흠, 그래? 하즈키가 잠시 나갔어,

바꿔 줄 수가 없네?”


“아니야, 괜찮아.”


“저녁은 먹은 거야?”


“응, 먹는 중이었어.”


“알았어, 그럼 다음 주에 봐

내가 갈게.”


“응, 나오코.”


“안녕.”


“응, 안녕.”


어둠을 버티다가 먹은 음식들을

모두 토해낼 것만 같았다.

급하게 조명등을 모조리 켰다.

코하네는 이 순간

나오코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코하네는 먹던 음식도

치우지 않고 또 한 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겉옷을 걸쳤다.

오랫동안 신지 않았던

마호가 선물해 준

하얀 단화를 꺼내 신었다.


아키라의 굿둣방,

아니 유키코의 집을 가야만 한다.


코하네는 세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계속 걸었다.

골목길을 따라 걷는 건지,

온갖 냄새를 따라 길을 걷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저녁을 알리는 냄새는

가지각색이다.

그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말 저녁 골목은 늘 그렇게

소리와 냄새로 가득했다.


비는 멈추었고

아스팔트는 젖어 있는 상태다.

마호가 준 신발이 어느새

회색 물이 들어가는 중이다.

코하네는 정말 유키코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는지,

회색 물에 젖은 신발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많은 생각이 필요 없다.

아스팔트 위를 띄엄띄엄 골라

걸으며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길게 늘어진 줄을 보니,

지하철 한 대는 그냥 보내야 할 것 같다.

지하의 탁한 공기는

여전히 그녀의 코를 가만두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기침과 재채기는

그들에게 그리 반가운 소리는 아닐 것이다.

까맣게 탄 얼굴이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랐다.

십여 분을 재채기로

소비하고 난 후,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꽃들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비로 떨어진 꽃잎들이

아스팔트 위를 보기 좋게

장식하고 있었다.

역에서 유키코의 집까지

걸어가는 길을 걷는 동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일부러

마호의 집을 거쳐 갈 생각이다.

조금 더 걸어도 괜찮다.


‘설마 있을 리… 가.’


당연히 그의 집은

아주아주 캄캄하다.

한참을 마호의 집 앞에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 보았다.

그곳에도 꽃잎이 한창이다.


출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꽃잎들이 떨어지기 전,

늘 이 길을 아키라와 걸었다.

아키라의 지팡이,

수십 년을 써도

모양이 변하지 않았던 모자,

그의 낡은 신발,

모든 게 눈에 선하다.


이 계절은 늘, 아키라를

대단히 그립게 만들었다.

아키라의 구둣방이 가까워질수록

웃음소리도 가까워졌다.

먼저 노란 노아의

머리통이 먼저 보였다.

노아가 코하네를 먼저

발견하고 크게 말했다.


“여기, 여기 어서 와요.”


노아가 기다란 팔을 흔들어 보인다.

그들의 손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구둣방 앞에서 앉아

도란도란 얘기 중이었다.

유키코가 뛰어와

코하네를 반기며 말했다.


“코하네, 웬일이야?

소식도 없이, 놀랐어.”


코하네가 쌩긋, 웃었다.


“보고 싶어서요.”


코하네가 갑자기

유키코의 품에 와락 안긴다.

유키코는 아무 말 없이

잔잔히 코하네를 품어 주었다.

코하네가 훌쩍인다.


“으응? 뭐야? 코하네?

우는 거야?”


노아가 유키코가 들고 있던

찻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들어가요.”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키코의 어깨에 기대어 걸었다.

코하네는 순간

북받치던 눈물의 이유가

한 마디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유키코의 궁금해하는

눈빛에도 설명할 수가 없다.


“코하네, 저녁은?”


“으응, 너무 많이 먹었어요.”


“어이구, 차 한 잔 줄게, 기다려.”


“네, 고마워요.”


노아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음악 틀어 줄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The Beatles – Let it be ♪♬


노아의 일본어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이다.


“코하네에게 맞는 노래예요.”


뜻 모를 영어 노래는

음의 소리로 판단하게 된다.


“그래요?”


“예스.”


그때는 몰랐던 노래의 뜻을

시간이 지나고 알았을 땐,

노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아쉬웠다.


“자, 마셔, 이건 노아가 가져온 건데,
음, 이름이 뭐더라,

기억력이 정말 좋지 않군,

큭 하여튼 좋은 거래.”


“푸흣, 네 잘 마실 게요.”


눈치 빠른 노아는

이미 그들을 위해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다.


“안 그래도 오늘 마호에게

연락이 왔었어,

너에게 해 볼 참이었는데…”


코하네의 눈이 동그래진다.


“네? 마호가요?”


“왜 그렇게 놀라?”


“지금 어디라고 해요?”


“여행 중이라고,

근데 몰랐던 거야?”


“아뇨, 알고 있었는데,

혹시 왔나 해서.”


유키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약간 이상한데?

너희들 무슨 일이야?”


비틀스의 뜻 모를 음악은

언제 들어도 감정을 끌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얼굴이 좋지 않아.”


유키코는 서두르지 않고

코하네의 이야기를 기다려 준다.


“마시고 있어.”


“네.”


유키코가 담요를 내밀며

고타츠를 켰다.


“자, 덮어 아직 밤엔 추워,

너무 얇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유키.”


“응.”


“오늘 자도 될까요?”


유키코는 손을 위로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네 방이 바로 여기 있는걸.”


코하네가 끄덕였다.


“오래전에 엄마가 죽고

신페이가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나요,
아빤, 내가 있는데,

자꾸만 쓸쓸하다고 했어요
그땐 정말 이해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젠 너무 이해를...”


“코하네.”


어깨가 서늘한 느낌에

유키코는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린다.


“내가 이상한 건지,

신페이도 사라지고,

할아버지도… 그런데 쓸쓸한 게 무언지

전 잘 몰랐어요.”


“넌, 혼자가 당연하다고,

어쩜 그리 생각했는지도 몰라.”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런데 알아버렸어요,
이게 불행한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어요
나, 아주 많이 쓸쓸해요 많이요.”


“코하네, 이리로 와.”


코하네는 유키코의

어깨에 기대어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한참 눈을 감고

음악을 들었다.

반복되는 음악 소리에

코하네는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소리 나는 대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마주하더니

아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에 마술처럼

노아가 다시 유키코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웃었다.




집 안이 오랜만에 시끄럽다.

웬일로 등장한

삼촌 하즈키 얼굴을 보고

쇼는 연신 신나서 달리기 바쁘다.

쇼는 하즈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따라나섰다.


코하네와 전화 통화를 마친

나오코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팥이 들어간 떡을 한입 베어 문

겐토가 무심한 척,

나오코에게 물었다.


“왜 그래?”


“응? 아니야.”


“온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아니.”


“저 자식, 며칠을 고민하던데,

무슨 일 있었나?”


순간 나오코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진다.


“고민? 왜?”


나오코가 자신에게

집중하며 귀 기울이는

모습이 싫지는 않다.


“왜긴?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며칠을 함께 있었는데?”


나오코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래도 마호 씨잖아?”


“남자는 다 똑같아,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이
코하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 자식이 고민될 만도 하지.”


“흠, 마호씨는

다른 남자들과는 아주 달라,
뭘 알고 말해

코하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절대 그 애가 힘들어하는 일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쳇.”


“하즈키를 봐, 저렇게 말없이 와서,

코하네를 신경 쓰이게

하고 있잖아?”


겐토는 섬에서

코하네의 연락 두절에

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오코,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갑자기 나오코가 코웃음 친다.


“그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거

알고 덤빈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고민해?

안 그래?”


겐토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모든 것을 알고 떠안으려

작정했다고

고민되지 않는 건 아니야.”


나오코가 겐토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았다.

겐토도 말없이

팥이 들어간 떡을

마저 입안에 구겨 넣으며 씹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거나, 고민한다면
결론을 어떻게라도

짓겠다는 거야?”


나오코는 마치

겐토에게 말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겐토의 목소리가 금방

낮고 묵직한 소리로 변했다.


“글쎄, 수긍하던가 그 반대든, 하겠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겐토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한쪽 입술 꼬리까지 올라가는 중이다.

마침 쇼의 목소리가 들리며

하즈키와 함께 들어왔다.

쇼가 겐토에게 달려간다.


“아빠.”


“어디 보자, 이게 다 뭐야?”


쇼가 내민 봉투에는

가지각색의 과자들과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장난감을 좋아하지도 않고,

금방 싫증을 내는 쇼를

생각하니 하즈키의

주머니가 안타깝다.


“하즈키, 쯧쯧.”


나오코도 겐토를 따라 혀를 찬다.


“쯧쯧, 하즈키.”


겐토가 말했다.


“이 자식, 아주 그냥

엄청 허전한가 본데?”


“시끄럽다 처음인데 봐주라.”


나오코가 끼어들었다.


“코하네한테 말 안 한 거야?”


코하네라는 말에

하즈키의 눈동자가

잠시 슬퍼지는 것 같은 느낌은

나오코만 눈치챘을 것이다.

하즈키는 말이 없다.


“방금 통화했는데,

오라 했더니 아직도 피곤한 기색이네.”


하즈키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왜 해?”


겐토가 장난감 봉투를 들고

쇼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깜짝이야, 왜 소릴?”


하즈키의 한숨이 굉장히

길게 늘어졌다.


“하아아…”


나오코는 더욱

하즈키를 자극하고 있었다.

정말 그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인지,

나름 이 기분을 즐기고 있는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나오코의 눈가에 웃음이 남아있다.

마치 젊은 미네코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호 씨는 둘 사이

방해할 사람이 아니야,

코하네를 정말 배려해
하즈키가 예민한 거야.”


하즈키가 말했다.


“그래, 넌 그렇게 말하지.”


나오코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콧노래까지 부르며

주방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갈비를

구워 먹을 거야 겐토,

좀 도와줘요.”


하즈키가 거실 중간에 서서

방에서 나오는 겐토에게,

나오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나 간다.”


“아니, 야! 저녁 먹고 가야지?”


“쉿 쉿, 호들갑 떨지 마, 갈게.”


하즈키가 간다는 것을 알면

쇼도 나오코도 난리법석일 게 뻔하다.


“알았다, 연락해라.”


하즈키는 조용히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를 내며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탈출했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코하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뿐.


나오코의 말처럼

자신이 치졸하게 굴고 있다는 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즈키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흔들면 치졸하게 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라고

기대를 해 보지만,

전혀 효과가 없는 짓이다.

무작정 걸었다.


‘따뜻한 날에 함께.’


함께,라는 단어 속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코하네의 눈빛이

자신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고 있을 것 같아

잠에서 깨어 있는 그녀를

보기가 자신이 없다.

뭔가 다짐을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뇌가 시키는 대로.’


다행히 주머니 속에

동전이 가득하다.

밤새도록 통화를 해도 남을 양이다.

코하네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길게 울리기만 하는 소리를

계속 듣고 또 들었다.

나오코와 통화를 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하즈키는 다시 빠르게 서둘렀다.

오늘따라 택시는

하즈키의 마음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실례지만, 빨리 좀 가 주십시오.”


백발의 기사는 백미러로

하즈키의 얼굴을 확인하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하즈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급한 일이면,

그렇지 그럴 게야.”


백발의 노인은 젊은 그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노인은 길을 아주 잘 아는 모양이다.

골목길을 돌아 나온 자리에

그곳이 떡, 하고 자리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고맙소, 행운을 비네.”


하즈키는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가 좀 안 된 시간이다.

구둣방은 아직 불이 훤하다.

제대로 코하네를 마주하는 게,

얼마만 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즈키에게 너무도 긴 시간이었는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 시간을 생각할수록,

다시 가슴이 조이는 것을 느꼈다.


코하네가 보고 싶다.


구둣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음악만 틀어져 있을 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의 종소리에

누군가 놀란 발을

콩닥거리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앗, 왔어요?”


하즈키는 이 순간만큼,

굉장히 쑥스러웠다.

치졸한 마음을 모조리 들킨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문이 열려 있어서.”


유키코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하즈키가 올 줄 알고 열어 놨어요.”


보기 드문 하즈키의 머리 긁기가 나온다.


“어서 들어와요,

우린 이층에서 한잔 하는 중이었어요.”


“아, 네.”


“먼저 올라갈래요?

난 먹을 것 좀 갖고 갈게요.”


“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곧 가족이 될 텐데요.”


유키코가 웃을 땐,

정말이지 아름답다,

머쓱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달아나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주 씩씩하게 계단을 오른다.


가장 듣고 싶었던

코하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담요를 칭칭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보였다.


까맣게 탄 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되돌아오기 싫은 게 분명하다.


하즈키는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하필 그때 노아마저,

잠시 미동도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코하네는 정말 놀란 눈치다.


“아 하즈키.”


그제야 노아가 손을 내밀며

그를 이끌었다.


“아, 어서 와요, 오랜만이에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코하네는 놀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하즈키, 어떻게 왔어요?”


코하네의 표정은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말 새카맣게

그를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다시 치졸해지고 있는

마음을 잡는 중이다.

하즈키는 애써 웃으며

자연스럽지 않게

코하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집에 없길래, 달려왔지.”


달려왔다는 단어를 쓴,

자신의 급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다.


“아…”


노아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즈키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우리 함께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는 날에 대해서 말이에요.”


하즈키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다.

노아는 유키코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달려가 무거워 보이는

쟁반을 들어 나른다.


“나를 부르지 그랬어요.”


유키코는 노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의 친절에

사랑을 담아 말했다.


“괜찮아요.”


코하네의 옆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하즈키를

힐끔 보며 유키코가

한마디 건넸다.


“혹시 몰라서 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 자 들어요.”


갓 쪄낸 콩에서 김이 모락모락,

귀한 바나나는

아주 잘 익은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하네와 하즈키는

어색함을 뒤로하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상한 건, 하즈키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하네가 말한

쓸쓸함을 유키코는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있어도 정말,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왜, 마침 마호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유키코도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야기는 점점 그들이

가족이 되는 그날에 대해서

심오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코하네는 노아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싶다며

그것에 대해 귀를 기울였다.


유키코는 이미 노아의

종교를 함께 하고 있었으며

가끔 노아는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이름은 귀를 간질일 만한

정말 예쁜 이름이었다.


그날, 이후 코하네는

열심히 그들을 따라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세례명 또한 갖게 되었다.


굉장히 복잡한 것들을

뛰어넘어야만 신앙을 품을 수 있었다.

코하네는 살아 가는데

큰 힘을 얻었다면서

아주 행복해했다.

코하네는 늘, 기도하고

감사하고 사랑했다.


당연히 하즈키도

그때마다 늘 함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날들에 대해서

잘 극복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따뜻한 날에 함께, 가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출처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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