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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소아과의사 Nov 02. 2023

나에게 삶을 가르쳐준 스승들에게

모든 별세자의 날에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이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 내가 만났던 대분의 죽음은 어린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생명력이 죽음앞에서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것을 보던 모든 순간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니 남기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마지막 순간의 용기를, 그 삶의 찬란함을 기억해주기 위해 기억하고자 애썼다. 

죽음의 순간은 어떤 사람에겐 천둥 번개처럼 다가오지만, 어떤이에겐 만조에 따라 스며드는 물처럼 순서를 지켜 다가온다.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젊은 여성이었다.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마치 한순간 한순간 삶의 마지막장을 딛고 있는 것처럼 위태롭게 누워있던 여성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아직 20대 였던 내 눈엔 그 모습이 안쓰럽고, 때로는 무서웠다. 어떻게 저런 신체적 상태에서 고통을 견디며,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을까. 그도 그럴것이 중환자실이라는 곳이, 대부분 의식이 없이 생명 유지장치에 삶을 의지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술을 하기위해 오며가던 길목에 기다리던 가족들, 그 어린 아이와, 젊은 남편, 그리고 지금 기억으로도 젊어 보이는 부모님. 

아마도 곧 매우 슬픈 결말이 기다렸겠지만, 나는 보지 못했고, 그래서 내 기억 속에 그녀는 거기에 멈춰있다. 고통을 참는 그 처연하고 용감한 모습으로. 

아들의 돌잔치날, 오프를 받았고 사람들을 초대한 주인으로서 가기 위해 준비해야하는 시간에 난, 한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1쯤 되었을까. 내가 소아과 인턴을 돌던 첫주에 백혈병 재발이라 골수 검사를 다시하였던 아이였다. 그렇게 2-3주만에 악화되었고, 호흡기에 무리가왔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져갔고, 부모님께 기관삽관을 하고 중환자실을 갈것인지 상의한 모양이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 어차피 가야할길 고통을주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아이의 산소포화도가 95%에서 80%에서 그리고 다시 75%로 떨어지는 그 고통스럽고 긴 시간을 함께했다. 산소를 아무리 주어도 올라가지 않는다. 몸에서 산소를 받아주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사람생각대로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산소포화도가 100%에서 갑자기 50%로 떨어질리 만무했고, 그 숨막히는 고통을 십대 소년이 고스란히 느끼며,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변하고, 호흡이 가빠와 누워있지 못했다. 

언제오냐고 연락하는 엄마에게 짜증내던 동생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이내 눈물을 흘린다. 마치, 그 방의 문이 열리면서 한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이 방은 가족의 눈물이 되었다. 

  그렇게 5시쯤 되었을까. 소년이 말했다. 산소호흡기를 하겠다고. 소아과 선생님이 그러면 이제 넌 다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기관삽관을 하기위해 진정제를 투입하자 호흡이 멈추었다. 의미없는 심장 마사지는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의 의지로 마지막을 선택했다. 호흡과 사투를 벌이던 용감한 소년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아들의 돌잔치에 도착하여, 손님을 맞고 사진을 찍고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년에게 있었을 아름다운 돌잔치와, 부모님의 기쁨이 오늘 다시 슬픔으로 돌아왔구나. 

어느 당직날, 저녁 8시가 넘어서 병동에서 입원환자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 인계받은적도 없는 일이라 부랴부랴 올라가보니, 서울 유명 병원에서 골수이식까지 마친 백혈병 재발 환아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의무기록과 편지엔 고작 "보호자가 원해서 전원함"이라고 적인 의뢰서 뿐이었다.  골수이식후 발생한 면역 저하로 허리엔 수포가 가득했다. 외부성기에 물집이 가득했기에 소변보는 것 조차 불편했다고 했다. 혈액검사 수치는 더 엉망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연락도 미리하고, 마지막으로 썼던 약과 상황까지 모두 요약 정리해서 보내주는 것이 맞았을 텐데, 도망온 것 처럼 고향에 있는 병원으로 온 어머니와 아들이 몹시 딱했다. 당장 수백장에 달하는 의무기록을 차례차례 뒤지고 나니 한두시간쯤 지났다. 해야할일들을 쭉 적어보니 시간이 너무 없다. 들어가야하는 약의 순서를 정해도 빠듯하다. 

다음날 회진을 돈 후 어머니가 어디까지 해주길 원하는지 알았고, 우린 끝까지 해보기로헀다. 아이는 어제와 다르게 벌써 산소 마스크의 농도를 올려가고 있었고 허리에 드레싱을 마치고, (비뇨기과 의사도 못했다던) 폴리를 끼우고 나니 점점 우리를 떠나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마음은, 딱 하루만 시간이 더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저녁이 되었다. 그날은 내가 당직이 아니지만, 퇴근할 수 없었다. 저녁 회진 이후 부랴부랴 중환자실로 옮겼다. 혈압이 올라가지 않는다. 강압제를 올리고, 생리식염수를 짜고, 혈압이 오르지 않는다. 더이상 . 

어머니가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 ㅇㅇ 이가 선생님 생각처럼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건가봐요" 

안고있던 생리식염수를 내려놓고, " ㅇㅇ님 ㅇㅇ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ㅇㅇ시 사망하셨습니다 " 라고 겨우 말을 마친후 나왔다. 부모님은 어린아들을 두고 한참을 우셨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아기들은 떠나갈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28주 미숙아로 태어나 잘 크고 있었는데, 신부전이 왔다. 한달을 넘게 끌었고 신부전 수치도 좋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패혈증이 왔다. 소변을 안볼때는 인큐베이터 앞에 하루종일 매달려서 그저 소변 1cc라도 더 나오라며 기다렸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소변이 잘 나오고나서 이제 좋아지려나 했는데, 허무하게 떠나갔다.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 신생아 중환자실 코드블루가 뜨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도와가며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걸음에 달려온 엄마아빠는 엉엉 우신다. 울음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아빠의 눈물,콧물이 병실 바닥에 흥건해진다. 소리가 울린다. 아이는 한번도 안겨보지 못한 작은 인형처럼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있다. 엄마,아빠가 2주전 부랴부랴 선물해주신 이름덕에 이름도 가져보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퇴원을 했다. 


환자를 잃은 후, 나는 칼을 간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다. 괴롭고 슬프다.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닌데,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럴까 되짚어본다. 그래서 나는 먼저간 나의 환자들을 잊지 않고자 한다. 삶이 짧아서 무의미한 것도 아니요, 용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 고통을 견뎌준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용기있다 칭찬하고 싶다. 

이들이 아팠던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고통이 내것이 아닐리 없다. 그 고통이 그저 그에게 먼저 가 닿았을 뿐. 

그래서 찬란히 살아있는 아이들에게 더 감사한지 모르겠다. 약간이라도 비치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잡아내기 위해 예민해지는지 모르겠다. 작은 그 찰라의 순간에 문턱을 넘지 않도록 내가 손을 잡을 수 있게,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스승이다. 내가 넘어졌을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고, 달려갈때 더 열심히 달려가도록 용기를 주는 나의 스승들이다. 


오늘은 모든 별세자의 날이다. 교회력으로 모든 성인들의 날 이후에 오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영화 '코코'에 나오는 망자의 날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의 삶이 헛되지 않았기에 오늘, 그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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