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교양의 시간

by 추지원

1.

입방정은 재앙의 전조다.

“올겨울은 안 춥네.”

그 말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겨울은 예의 바르게 반박한다. 그러셔요? 하고. 그렇게 몸을 드러낸다.


영하 8도.

노숙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문을 걸어잠글 수 있고, 그 문을 잠갔다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되는 밤. 나는 그 특권에 잠깐 흥분한다. 안에 있어도 된다는 허가, 밖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

그러나 추운 것은 윤리도 아니고 의견도 아니다. 그건 그냥 추위다.


우리 강아지는 품종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강아지에서 돼지로.

옆구리가 부풀어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학습하자마자 나는 즉시 날씨 앱을 연다. 사료의 문제는 기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을 택한다.

정오, 영하 2도. 좋다. 이건 타협이 아니라 합의다. 시간을 맞춰 나가면 세계도 잠시 맞춰준다.


뒷다리가 달린 우주복 패딩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입히는 순간 미미는 얼음이 된다.

쿠팡에서 주문한 비싼 우주복은 개념으로만 남긴다. 기모 내복 위에 뒷다리를 가리지 않는 패딩을 입히고 하네스를 채운다. 완벽은 포기하고 기능을 채택한다.

우리는 그렇게 영하 2도의 정오를 향해 나아간다. 이건 산책이 아니라 조건을 맞춘 외출이다.


미미는 태어난 지 삼 주가 지나 나에게 왔다.

아기 때부터 키운 개는 주인을 알아보는 대신 신호를 알아본다. 미미는 내 신호에 컨디셔닝되어 있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미미의 신호에 내가 컨디셔닝되어 있는 쪽일지도.

우리는 서로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아직 울리지 않은 종소리를 기다린다.


산책길에는 미미가 유독 멈추는 지점이 있다. 내 조카가 사는 동네 근처다.

여행을 갈 때면 미미는 그 집에 머물렀고, 그래서 그 아이를 가족으로 분류했다. 그 동네에만 가면 미미는 자주 멈춘다. 냄새를 맡는 범위는 지나치게 좁다.

두 걸음 걷고 냄새, 다시 두 걸음 걷고 냄새. 마치 이 구역에만 세계의 비밀이 매장되어 있다는 듯이.


‘꼬꼬(고기)’나 ‘고구마’를 아무리 불러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미미는 고집 센 개가 아니다. 다만 이미 다른 신호를 선택했을 뿐이다.


문제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행인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컨디셔닝도 성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를 좋아하는 행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산책길은 보통 웃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날도 있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매서운 바람에 모자를 여미며 미미의 냄새 맡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 명의 부인이 대화에 참여했다.

“개가 춥나 보지. 추워서 가기 싫은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짜증이 난다.

나는 검증 없이 단정하는 행위를 싫어한다.


“그건 아니고요.”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낸다.

“개들은 냄새 맡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자꾸 멈추는 거예요.”


조카가 사는 동네라는 맥락까지 제공할 필요는 없다.


“아유, 그러면 냄새를 맡아야지. 많이 맡게 해요. 재촉하지 말고.”


나로 말하자면 나는 대화에는 언어와 맥락과 제스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잘 감지하는 편이다.

추운 날 서서 갑자기 내 선생이 되겠다고 자청한 두 사람 앞에서 짜증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네, 날씨가 추워서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서요.”

이건 설명이라기보다 변명이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이 상황이 꽤 즐거운 모양이다.

어느 순간 세상이 더 이상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면 차라리 사고라도 하나 나는 편이 덜 지루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추운 날 데리고 나오기는 왜 데리고 나와요. 강아지가 고생이네.”


그 순간 나는 끈을 던졌다.

차갑게, 결론처럼.


강아지 종 전체를 변호하겠다는 각오로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인내심은 이미 폐기된 상태였다.

꽤 걸었다고 느낄 즈음 뒤를 돌아보니 미미가 말없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말을 안 듣고 아무 데로나 가려고 할 때 “엄마 간다. 안녕.”이라고 말하면 엄마를 놓칠까 집중해서 따라오는 것.

이것 역시 미미의 컨디셔닝 중 하나다.


여기쯤에서 잔혹한 상상을 해본다. 내가 그 부인들 앞에 멈춰 서는 장면이다.


“개 키우세요? 안 키우시죠?”


확률은 높다. 그들은 개를 키우지 않는다. 키워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 다만 요즘 강아지를 예뻐하고 보호하는 태도가 인격적이고 여유 있어 보인다는 사실은 안다. 그래서 그 태도의 외형만 빌려 쓴거다. 내용은 생략한 채로.


상상 속에서 그들이 잠깐 망설이는 동안 나는 말을 잇는다.


“안 키워보셨으면 강아지 엄마가 강아지를 어떻게 위하는지 알 수 없어요. 강아지의 생리나 특징도 모르시겠죠. 그러면 사람이 왜 어떤 걸 허용하고, 왜 어떤 걸 막는지 그 신호를 읽을 수도 없고요.”


나는 숨을 고르지 않는다.


“가뜩이나 추운 날 굳이 제 앞을 막고 훈수를 두시면 성취감이 좀 오르시겠죠. 중요한 일을 한 것 같고, 서로에게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네, 알아요. 보이니까요.”


마지막은 간단하다.


“다른 데 가서 다른 일거리 찾아서 그렇게 하세요. 제발 저와 저희 미미는 괴롭히지 마시고요. ‘예의’라는 이름으로 참아보려다, 오늘은 예의를 내려놓기로 했거든요.”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 모든 말을 끝까지 한다.


어…… 시원하다.


그러나 나는 어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내일 죽을 몸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대신 씩씩대며 앞서 간 나를 끝내 따라온 미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미미를 안아준다.

허영이 뭔지 모르는 미미는 일관되게 성실하다.


2.

남의 병문안을 갔을 때 병간호를 하는 가족 앞에서는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상의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환자가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하면 더 불편하다느니 하는 말들은 도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호하는 사람을 서럽게 만든다.


훈수는 조언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훈수를 두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 명분은 언제나 단정하다. 상대를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 생각해줘서, 도와주기 위해서. 그러나 잔인하게 말하면, 훈수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삶에서 영리하거나 지혜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


움이 되려면 좋은 결과를 목표로 해야 하고,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좋은 방법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끝내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 바로 훈수다. 쉽고 빠르며, 대개는 가장 나쁜 방법론이다.


왕비 어머니의 맏딸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철학적이었다. 불쌍하게도.


아주 어린 나이에 나는 사랑이란 결국 “고마워”와 “미안해”를 말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른이 된 지금, 그 결론은 차라리 숨기고 싶은 상처에 가깝다. 외롭고 비루한 아이의 영혼이 스스로 발견해낸 철학을 선뜻 존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성에 남은 왕비는 아름다워서 더 처연했다. 아이는 설날마다 받은 새뱃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까치가 새겨진 통장에 넣었다. 가을이 오고 왕비님의 생신이 다가오면, 아이는 그 통장을 열어 안에 든 돈을 모두 꺼냈다. 아끼고 또 아낀 돈을.


울 목도리나 살에 닿아도 거슬리지 않을 쿠션을 사기 위해 쁘랭땅 백화점에 갈 때도 아이는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선물을 받은 왕비가 교양을 이유로 조언을 건네면, 아이는 얼굴을 붉혔다. 왜 울보다 캐시미어가 더 좋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이는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나무랐다.


아이는 자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대신 “고맙습니다”를 말해주고 싶어졌다. 반찬이 적다고 타박하는 사람을 볼 때, 이것밖에 못 했냐며 화를 내는 사람을 볼 때, 야단을 맞고 작아진 사람을 볼 때마다.


반찬 한 가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료와 시간과 마음이 필요한지, 왕비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이미 충분히 배웠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훈수가 아닌 바른 관심과 도움은 어떻게 드러날까.

나는 그것이 지혜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내가 본 것은 대체로 지혜였다.


환자를 위해 병간호에 지친 가족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들은 먼저 타이밍을 찾는다. 도움으로 가득 찬 환자와 배려 없는 방문객들 사이에서 이미 지쳐버렸을 때, 들을 귀가 닫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고, 다정함으로 먼저 숨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꼭 필요한 말만을 건넨다.


더 나아가서는 말보다 먼저 자기 시간을 내어 그 자리에 남는다.


추운 날 미미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나는 생각보다 많은 말을 마음속에서 했다. 말로 하지 않은 문장들이 몸에 남아 하루 종일 나를 따라왔다.


아, 이 성질머리를.

나는 평생 안고 가야 할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쓸 수 있는 글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안을 지키는 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분들이 계셔서 나는 오늘도 하루를 미소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